나는 감베타 역에서 내렸다. 계단을 따라 올라와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세월의 이끼가 낀 돌담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담길 위로는 7월의 아침 햇살을 맞는 담쟁이 넝쿨이 손을 흔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길에는 파리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주차 행렬이 이어졌다. 묘지 입구가 보였다. 이곳은 후문이다. 정문은 페르 라세즈 역에 있다.
묘지 입구에 꽃집이 보였다. 묘지 입구에는 꽃집이 있지. 묘지와 꽃집, 어울리는 조합이다. 꽃집에 들어가 흰색 장미를 세 송이 샀다. 꽃집 주인인 묘지 가냐 고 묻는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묘지 입구에서 왼쪽 보도를 따라 걸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국제여단 전사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다. 묘지 안은 조용했다. 죽은 자의 넋인 듯 바람소리만이 소근거렸다. 제각기 치장을 한 각양 각색의 무덤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무덤에는 십자가 조형물이 눈에 많이 띄었다.
보도를 따라 걷다 보니 ‘Allee du mur Federes’ 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 부근 어딘 가에 있겠지. 보도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그곳에 내가 찾는 코뮌 전사들의 벽이 보였다. 묘지 벽에 붙어있는 대리석 판에는 간단하게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 라고 써 있다. “코뮌의 죽은 자들에게 1871 5월21일-28일 “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지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다. 격분한 파리시민들은 제정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다. 정부는 프러시아와 평화교섭을 했다. 알사스 로렌을 프러시아에 양도하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물어주고 프러시아 군이 파리에 3일간 주둔한다는 조건이었다.
적의에 찬 파리시민들은 소극적 저항을 했다. 3일동안 가로등이 꺼졌고 조기를 게양했다. 카페 술집 상점은 영업을 중지했다. 파리 시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하지 않았다. 프러시아 군은 3일 동안 침묵과 어둠의 포로가 되었다.
정부 수반 아돌프 디에르는 반항적이고 좌파적인 파리를 떠나 정부를 베르사유로 이전했다. 파리는 봄이 시작되는 3월18일 노동자 자치정부 코뮌을 선포했다. 레닌은 파리 코뮌이 다가올 사회주의 혁명의 예시라고 극찬했다. 막스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으로 공공연하게 인정된 최초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코뮌은 단명했다. 디에르는 병력을 베르사유로 집결시켜 코뮌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스파이의 밀고로 파리에 진입한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5월21일-5월28일을 피의 주간이라고 부른다. 늙은 자코뱅 들레쿠루즈는 2월혁명 때 입었던 검정 바지와 프록코트를 입고 깨끗하게 닦은 장화를 신고 볼테르 광장을 지나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섰다. 저녁 햇빛에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자 총성이 울렸다. 그의 몸은 바리케이드 아래로 떨어졌다.
정부군에 밀린 최후의 코뮌 전사들은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로 후퇴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묘석을 엄폐물 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총알이 떨어져 항복했다. 정부군은 묘지 담 앞에 147명의 코뮌 전사들은 세워놓고 총살했다. 1871년 5월28일이다.
세상이 아이러니 한 게 코뮌 자치정부를 진압한 정부수반 디에르의 무덤이 페르 라세즈에 있다는 거다. 디에르는 코뮌을 진압한 후 3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냈는데 대통령 지낸 사람이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것도 한국인 정서로는 선뜻 수긍이 안된다.
초라한 전사들의 벽 건너에는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들의 화려한 무덤이 있어 대비가 된다. 최초의 노동자 자치정부를 프랑스가 어떻게 대우하는 지 알 수 있다. 전사들의 벽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체리가 필 무렵’을 작사한 장 바티스트 클레망 묘지가 있다.
클레망은 코뮌 지도자 중 한명으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퐁떼느 오 루아의 바리케이드 속에 있었다. 체념과 적막 속에서도 야릇한 흥분이 흐르고 있었다. 클레망의 눈에 부상병 치료에 여념이 없는 20대 초반 젊은 여자가 보였다. 클레망은 젊은 코뮌 전사에게 “너는 살아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라.” 고 권했으나 묵묵히 부상병 치료를 할 뿐이었다.
젊은 코뮌 전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무사히 몸을 피했는지, 군사재판 받고 감옥에 갇혔는지, 147명 중 한명으로 총살당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클레망은 정부군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다 10년 지난 후 사면 받아 귀국했다.
시인이기도 한 클레망은 체리가 익을 무렵을 써서 젊은 코뮌 전사에게 바쳤다.
‘1871년 5월28일 일요일 퐁텐 오 루아 거리의 구급요원 용감한 시민 루이즈에게’
5월이 되면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을 더듬는다. 혁명은 박제가 되었고 철 지난 쓸쓸한 바닷가처럼 머나먼 추억이 되었다.
1871년 5월21-28일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
1980년 5월18일-5월27일 광주의 죽은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