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해국밥집을 나에게 소개해 준 사람은 에드먼튼 공항에서 만난 백인 집시여인이었다. 한국으로 배낭여행을 간다는 그 집시여인 비슷한 여자애 일행들과는 인천공항에서 작별했다. 그 날 내가 한국에 입국하지 않고 베트남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으로 환승했기 때문이었다.
송해국밥집은 옛날 허리우드 극장 건물 아래 낙원동 악기상가 골목에 있었다. 북촌은 물론이고 교동 남쪽 낙원상가 일대까지 훤하게 꿰고 있는데, 이 식당은 처음 봤다.
가격은 2 천 원. 예상외로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할아버지들 동네인 줄 알았는데, 손님들의 연령대는 다양한 것 같았다.
두부가 두 조각 들어가 있었고 시래기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고기는 없었지만 육수맛이 나고 매콤한 국물은 제법 시원했다. 가격만 저렴한 엉터리 국밥이 아니었다.
송해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어느 지인과 함께 순두부백반을 드셨다고 하는데, 종로 3 가 일대에서 순두부백반이라면 이 집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송해선생 하면 ‘전국노래자랑’을 떠 올린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시청한 적이 없는 전국노래자랑보다는, 80 년대 후반 라디오 교통방송 ‘가로수를 누비며’가 더 기억에 남는다.
1927 년 생이니 선생의 나이 올해 95 세다.
전쟁을 겪고, 나고 자란 곳을 혈혈단신 떠나야 했으며, 자식을 먼저 보내기도 하는 등, 견디기 어려운 극단의 일들을 겪었지만, 현대사의 파도를 타고넘어 온 그 파란만장한 인생사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은 딩동댕”이라며 웃음짓는 그 스스로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진다.
그의 내면의 핵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의 격에서 그 진심이 느껴진다.
“Blending and harmonizing a strong collective of individuals”
“Focus on the good of all living entities as integrated systems”
비록 생전에 잘 알았던 사람은 아닐지라도, 이런 분이 작고하고나면 커다란 빈자리가 저절로 느껴진다.
오래 살아 드디어 ‘참나’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백 년을 살아보니 60 전에는 모든 것이 미숙하다’느니 뭐니하며 하나마나한 소리를 300 페이지나 늘어놓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송해선생같은 분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그의 생전 단골식당에서 2 천 원 짜리 해장국을 먹으며 그의 삶의 궤적을 조용히 복기해 보는 것이 훨씬 유익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