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좆 됐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진짜 좆 됐다.'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인상적인 도입부다. 화성에서 홀로 조난당한 과학자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싸게 세일을 하고 있길래 샀다. 이 때가 나도 영어 소설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후에 이 소설이 영화화 됐을 때 아내와 같이 처음으로 캐나다에서 극장을 방문하게 된 계기가 된 소설이기도 하다.
이제 가벼운 영어 소설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러가지 읽을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를 읽다 보니 어떤 통찰이 생겼다. 먼저 외국 작품이 영어로 번역된 경우 읽기가 참 쉬웠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참 쉬운 영어로 쓰여져 있더라. 영미 작가가 여러 가지 기교를 섞어서 쓴 문장보다 일본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나같은 외국인 독자 입장에서는 읽기가 훨씬 쉬웠다.
스티븐 킹 같은 경우는 사전에도 없는 요상한 단어들을 지 맘대로 만들어서 여기저기 쓰고 있더라. 또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오래된 작가들의 문장은 어찌 자연스럽게 읽히지가 않더라.
여튼 영어문장을 읽는다는게 이제 더 이상 정신 노동이 아니라 여흥의 한 부분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참으로 기뻤다.
내친김에 캐나다 중고생들의 필독서라는 The Giver 라는 소설도 사서 읽었다. 이 책은 나보다 내 아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시리즈로 나온 후속편 2권까지 모두 샀다.
여행을 다닐 때에는 전자책에다가 주로 한국 책을 넣어서 읽었다. 그런데 수개월간 북미를 여행하다가 그만 전자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들어야 되는데 읽을거리가 없어져서 곤란해졌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근방 상가의 서점에서 하얗고 두꺼운 어떤 책을 아주 싸게 세일하고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사피엔스였다. 이스라엘 작가가 쓴 책이 영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여행 중에 자기 전에 읽으려고 샀다. 그리고 그 책에 홀딱 빠졌다.
사피엔스는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경제 문화 종교에 대한 인문 교양서적이다. 이 책이 자주 인용했던 총 균 쇠도 원서로 읽었는데 역시 아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나도 이제 심각한 책도 영어로 읽을 수 있구나 하며 에햄 내심 잘난척 했는데 최근 큰 코 다쳤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아이고야 도대체가 문장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문장 속에 여기저기 쉼표가 난무하며 관계대명사 행진에 도대체 해석이 안 돼, 내가 책을 읽으면서 즐기는 건지 내 스스로 공부 하는 건지 어느 순간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이게 검은게 글자고 하얀게 종인데, 나는 도대체 이걸 보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공자 - 중국의 고대 철학자 - 님이 나에게 찾아오고 뇌의학의 어려운 단어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나 스스로 고문하는 수준이 되면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수개월간 회의에 빠져 있다가, 최근에야 드디어 책장을 닫게 되었다. 만세!
하여튼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스스로 영어 독해를 잘 한다는 자신감을 깡그리 잃어버렸다. 자려고 누워서 이 책을 펴면 미처 한 문장을 채 읽기도 전에 잠에 곯아 떨어졌다.
'2 더하기 2는?'
다음 책으로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사서 읽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나는 눈을 떴는데 생판 모르는 방에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 관이 꽂힌채로 발가벗겨서 눕혀져 있으며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딘지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와중에 누군가가 2 + 2 답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역시 마션의 작가답다. 흥미진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드디어 주인공 나에게 룸메이트가 생겼다. 까무룩 잠들기 위해 책을 폈는데 3시간이 넘게 훌쩍 지났다. 결국 늦잠을 자서 오늘 배달에 늦을 뻔 했다. 밥도 못 먹고 5시간을 꼬박 쉬지 않고 달려서 겨우 10분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휴~ 책이 너무 재미없어도 문제, 너무 재밌어도 문제다.
내가 심심했던 이유는 어려운 책때문이었다. 다음 책으로 미치오 카쿠의 인류의 미래가 대기 중이다. 요새 안 심심하다.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