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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회를 안나가는 이유_3 |
작성자 캘거리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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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62 |
작성일 2007-12-20 21:53 |
조회수 2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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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신 하나님. 너무 무서워요...정의롭지 못한 하나님.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무자비한 하나님
이라고 나는 그동안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너무나 못마땅해 책을 덮어 버리곤 했다.
남모르게 고민하던 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느 책에 쓰여 있기에 이곳에 인용해 보고자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이집트 왕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내 백성을 떠나보내라"하셨으니 그들을 놓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집트 왕은 피라미드나 기타 토목공사에 인력이 부족한바 "너희가 말하는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니 내가 알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하나님은 이집트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애굽에 있는 모든 물이 피로 밖뀌어 모든 강에는 물고기가 죽고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다. 이어서 개구리, 파리, 피부병, 어둠등 재앙이 계속된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다 하나님은 열번째 재앙을 내린다. 애굽 전역에서 새로 난 것들을 모두 죽게 되는 재앙이다. 자식, 가축, 짐승등 모두..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에서 제외된다. 그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으나 이집트 백성들은 천지에 '사망치 아니한 집은 하나도 없었으며', 전국이 곡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재물들을 훔쳐그 땅을 나오게 되었는데 남자 성인만 60만명에 전체를 합치면 200만이 훨씬 넘는 거대한 이동이였다.
이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부근에 이르러,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시를 해서 광야에서 헤메는 것처럼 꾸며 이집트 군대를 유인하여 홍해를 가르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간 뒤 이집트 군대를 물속에 수장시키고 만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할때는 뭐하고 있다가 고통이 극에 달했을때 갑자기 나타났으며, 무차별한 재앙을 보내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죽이고 괴롭히고 죽였을까?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다른 백성은 무참히 죽도록 만드신 이런 극단의 인종차별 정책은 도대체 사랑과 공평의 하나님으로서 하실 일일까?
그 잔인함은 계속 이어니다.
이렇게 모세의 지도아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40년간을 헤메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 정복과정에서 '젖과 꿀'은 커녕 '피가 넘쳐나는'그런 땅으로 바뀌게 된다.
(중략)
여호수아 군대는 하나님의 비호를 받으며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는데, 한 번은 도망가는 적군에게 우박을 퍼부으셔서 "우박으로 죽은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찔려 죽은 자보다 더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번은 도망가는 적군을 더 물리치려고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하니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멈추게 하시어 "백성들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보다 더 잔인한 전쟁사가 또 있겠는가? 인간이 하는 전쟁이라면 그래도 믿겠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하셨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안되는 부분이다. 현대전처럼 폭탄이나 총에 맞으면 금방 죽겠지만, 이와는 달리 칼이나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은 며칠씩 고통속을 헤메다가 죽게 마련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이기기만 한다면 이런 참혹한 꼴을 보고서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니. 도대체 이런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좀더 구체적인 예가 하나 더 있다.
약 150여년전 미국의 어느 시골 교회의 이야기다. 교회의 높고 뾰족한 첨탑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가끔 발생했다. 그럴때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교회에 죄인이 있음을 아시고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벼락이 떨어질때마다 교인들은 모여 기도하면서 교인들중 '죄인'을 찾아내어 아골 골짜기로 데려 가거나 회개시키는 일을 계속 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만 있으면 용케 아시고 벼락을 내리는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셨다.
그러자 분명 교인들중 '죄인'이 있었음에도 벼락 떨어지는 일이 없어졌다. 누군가 와서 교회 뽀족탑에 피뢰침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이였다. 이제 교인들은 하나님이 조그맣고 보잘것 없는 피뢰침에도 꼼짝 못할 정도로 무력한 분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여기 있다.
성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직접 적어놓으셨다가 인생세상에 툭 떨어트려 놓은 책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를 이해할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도와주었다고 믿는 바를 적은 신앙고백의 기록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신을 바라보는 관점),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이를 부족신관이라한다.
몇천년전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처절한 생존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모신 정도가 아니라 성경에서 처럼 신을 그렇게 밖에 생각할수 없었던 것이다. 신은 무엇보다 전쟁에 능한 신, 만군의 주인 그리고 전투 사령관이 되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신은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그 신에게서 용기와 확신을 얻고 거기에 힘입어 이웃 부족을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부족이나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고 잔인하게 죽여야 하는 신이라야 한다. 이런 신을 부족신이라고 한다.
왜 우리가 몇천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받아 거기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하는 보편적인 사랑이나 정의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 되는 이런 신을 받들며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구가 판판한 것으로 보던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이, 신을 이렇듯 자신들만의 신으로 보던 그들의 부족신관도 우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는게 아니라 받아들이면 안된다. 진정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신관을 뛰어 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관은 유대인 자체 내에서도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제2 이사야서나 에레미야서에서는 이런 한 민족만을 위한 전투적이고 무자비한 신은 사라지고 만국을 통치하는 보편 신(Universal God)의 생각이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은 '무찌르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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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07-12-21 06:4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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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님, 글 잘 읽었습니다. 한인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하지만, 캐나다에선 기독교단 중에서 천구교단 다음으로 크고, 개신교단으로는 가장 큰 캐나다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anada)에서는 님께서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교회는 일부 한인 교회를 제외하곤 거의 없습니다.
캐나다 연합교회에서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해 가장 선두에 서서 노력했으며, 그 결실이 바로 지난 자유당 정권에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연합교단에서는 다른 종교와 대화를 시도하며 정기적으로 불교 스님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목회자가 님이 비판하는 그런 성서관을 갖고 있으면 교회 그만 둬야 합니다.
<a href=http://www.united-church.ca/
target=_blank>http://www.united-church.ca/
</a>
Robert Funk를 인용하신 걸보니 상당히 기독교에 대해서 아시는 것같은데 펑크 말고, John Dominic Crossan과 Marcus J. Borg의 책들도 권합니다. 크롸슨의 책은 약간 난해하고, 보그의 책은 더 대중적으로 쓰여져 읽기기 편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크롸슨은 천주교 신부였는데 그의 급진적 사상 때문에 사제직을 그만두고 교수일만 하는 것같고, 보그는 처음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크롸슨과 펑크와 더불어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Christ of Faith와 구분)에 관심이 많은 분이며, 모두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를 이끌어 나가는 주역들입니다. <a href=http://www.westarinstitute.org/index.html
target=_blank>http://www.westarinstitute.org/index.html
</a>
접근법에서 예수 세미나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접근을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님께서 거론하신 사 복음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싶다면,
<a href=http://virtualreligion.net/forum/complete.html
target=_blank>http://virtualreligion.net/forum/complete.html
</a>
에서 The Synoptic Problem에 대해서 더 연구해 보시면 좋겠군요.
그리고 많은 성서학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저자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고 믿질 않습니다. 사 복음서 모두 확실한 저자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의 문제점을 연구하다 보면, Q 라는 말을 접하실 건데, Q는 독일어로 source를 의미하는 크벨르 (Quelle)에서 나온 말로, 최초로 쓰여진 마가복음에 없는 정체 불명의 자료를 의미합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의 저자는 는 마가복음을 대본으로 해서 책을 썼는데 이 Q자료는 아직도 구전된 것이었는데 아니면 텍스트 형태였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에 없는 영지주의 문헌에 대한 연구로 Ellain Pagels가 쓴 영지주의 복음서들 (The Gnostic Gospels)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쓴 책입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성서 밖에 성서]로 아마 번역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책을 보면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책들이나 저자들은 Chapters에서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책들입니다.
쓰다보니 두서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안나가시더라도, 성서 문헌에 대해서 관심을 갖다 보면 소설보다 더 재미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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