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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과 장례식 참석은 그 의미에 차이가 있다.
장례식 참석은 누가 대신 할 수 있지만 조문은 대신할 수 없다.
조문은 망자와 조문자가 직접 마주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장에 참석한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는 그 나라 국민과 정부를 대표해 상대국에게 조의를 표한다.
그 예식의 핵심 중 핵심은 망자의 영정, 그리고 유해와 직접 마주하는 조문이다.
망자에게 조문은 하지 않고 리셉션과 장례식에만 참석했다는 것은 염불은 하지 않고 젯밥만 챙겨간 승려처럼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국은 의전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각국의 정상일행의 조문과 리셉션 장례절차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정교한 프로토콜을 마련해서 미리 배포했다.
장례식 전날인 18 일에는 런던시내의 교통통제와 혼잡이 예상되니 그 날 조문하는 정상들은 가급적 오전시간을 이용해 달라는 부탁도 첨부되었다.
대한민국 공군 1 호기가 서울공항을 출발해서 런던에 18 일 오전 중에 도착하려면 한국시간으로 당일 오전 7 시 이전에 출발해야 한다.
전용기는 히쓰로나 게트윅 같은 런던시내에 근접해 있는 공항에 내릴 수 없고 시내에서 68 km 떨어진 London Stansted Airport 에 내려야 하므로 공항에서 시내까지 차량이동시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외교부는 국가안보실과 대통령실을 통해 경호처 소속 항공통제관에게 첫 방문국인 영국 조문일정을 전달하고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진행되는 한국전 참전기념비 방문과 함께 영국방문의 핵심 중 핵심행사인 웨스트민스터 홀 조문에 차질이 없도록 공군 1 호기 비행계획을 수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도착지 행사일정을 전달받은 경호처는12 시간 공중이동과 1 시간 육상이동에 대한 세부적인 실행절차를 수립하고 VIP 커플 조문수송작전에 돌입했다.
D 데이인 18 일 오전 6 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심곡동 전술공군기지 안에 위치한 서울공항 (IATA 코드 SSN) 주기장에는 대한민국 KOREA라는 국가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보잉 747-8B5(8i)기 한 대가 엔진에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랬는지 환송 나온 고위인사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뿐이었다.
7 시가 가까워오자 공항에 나와있던 항공통제관과 외교부 의전실장이 연신 시계를 보며 대통령 전용차가 들어올 입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7 시 반이 되자 초조해진 외교부 측 관리들이 항공통제관에게 어떻게 된거냐는 눈짓을 보냈다. 참다못한 항공통제관이 부속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부속실은 집무실 옆이나 관저에 각각 사무실을 두고 대통령의 공사활동을 지근에서 보좌하는 기구다. 대통령은 관저가 아닌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므로 관저 부속실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속실 직원들은 그 날 오전 5 시 부터 대통령 부부가 사는 아파트먼트 입구에 대기하면서 부부가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먼트 건물 입구에는 대통령 부부를 태우고 서울공항으로 출발할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셰볼레이 타호 SUV 들이 줄지어 주차하고 있었다.
대통령 부부는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늦은 8 시가 되어서야 부스스한 모습으로 경호원들의 수행을 받으며 로비에 나타났다.
둘 다 검은색 조복 차림이었는데 두 사람의 행색이 좀 이상했다. 대통령의 뒷머리가 떡을 지어 있었고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부인은 밤새 누구와 싸움박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이 잔뜩 골난 표정이었고 머리 매무새가 가관이었다.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한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이 술에 절어 꽐라가 된 채 늦잠을 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부부는 영국왕실의 장례를 집전하는 기구와의 약속된 타임라인을 어기고 예정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출발하여 런던에는 세 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것이다.
상대국 의전당국과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해서 조문을 못하는 건 아니다. 장례식 참석이나 리셉션보다 조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상징적 의식이라는 것을 아는 다른 나라 정상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문을 했다.
예정보다 역시 늦게 유해안치소에 도착한 조세프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십 여 분 간 대기하다가 조문했고, 군중 속을 헤집으며 걸어가서 조문을 한 국가수반이 있는가하면, 나루히토 일본 국왕은 깜깜한 밤중에 일부러 웨스트민스트 홀을 찾아가 조용하게 조문하고 나왔다.
어찌된 일인지 대통령 부부가 머문 숙소는 언제 어느때고 조문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호텔은 아니었다. Four Seasons Hotel London at Ten Trinity Square 는 런던타워 바로 옆에 있는 오성급 호텔로 여왕의 유해가 안치된 웨스트민스터 홀까지는 지름길로 질러가도 4 km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킹엄궁이나 유해안치소와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좋은 호텔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멀찌감치 호텔을 잡았는지도 이상하다.
예를들어 다른 나라 정상들은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인근 호텔들에 옹기종기 모여 숙박을 하고 있는데 혼자 신촌오거리에 있는 호텔을 굳이 선택해 묵고 온 꼴이다.
더구나 버킹엄궁에서 열린 리셉션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멈추어 5 분 정도만 걸어가면 웨스트민스터홀인데 왜 조문을 굳이 안 한 것인지(못한 것이 아니라)는 국정조사나 특검을 도입해서라도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나는 엘리자베스 2 세 여왕의 죽음에 그다지 조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조문을 하러 간 사람이 굳이 조문을 일부러 안하고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온듯한 수상한 정황을 연구해 보면 이상하고 또 이상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다른 거였다.
혹시 평소 나대기를 좋아하는 부인이 리셉션에서 챨스 3 세 국왕을 만난 자리에서 활짝 웃으며 되지도 않는 영어로 “Congratulation on becoming King” 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며 악수라도 청할까봐 살짝 염려가 됐었다.
사고는 다른데서 더 크게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