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야드에서 새벽에 출발한지 6분만에 트럭에 이상이 생겼다. 길 한복판에서 엔진이 정지했다. 다행이 시골길이라 통행이 정말 없다. 비상 삼각대를 세우고 회사에 연락했다.
한 1시간 반 후에 토우 트럭이 왔다.
'야 또 너냐? 또 문제가 생겼어?'
몇 달 전에 문제가 있었을 때 나에게 밀리언 마일 드라이버 휘장이 달린 대체 트럭을 내려 줬던 토우 기사다.
백만불짜리, 아니 백만마일 드라이버
일요일 아침에 다시 토우 트럭에 매달려 회사로 돌아왔다. 다음날 월요일 수리를 기다리며 본사 드라이버 라운지에서 죽쳤다.
반백의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 같은 트럭커가 들어왔다.
'야, 너도 샵 수리중이냐?'
아주 심한 남부 억양을 가진 사람이다.
'아직 모르겠어. 어제 새벽에 길 위에서 엔진이 서버려서 토우 트럭으로 왔는데 지금 수리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아직 몰라.'
'어, 그러냐? 난 씨바,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정기점검 한다고 메카닉들이 내 트럭을 뺏어갔다, 야!'
전형적인 수다스러운 백인이다. 알아듣기 힘든 남부 억양이 부담스러워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샵에 가서 상황 좀 알아봐야겠다.'
샵에 가서 궁금한 걸 알아 본 후, 산책 좀 하다가 다시 라운지로 돌아왔다. 그 산적 같은 텍사스 사나이는 아직 라운지에 있었다.
'야, 너 트럭이 그 모양이었는데 어디서 잤니? 호텔에서 잤니?'
'아니, 내 트럭에서 잤어. 엔진만 섰지 APU - 메인 엔진이 정지된 상태에서 에어컨이나 히터를 쓸 수 있게 해주는 작은 보조 엔진 - 는 정상이었거든.'
'그래, 샵 녀석들이 뭐라 하든? 뭐가 문제고?'
'연료필터를 지지하던 브라켓이 부러져서 엔진에 적절한 연료가 공급되지 못해서 서 버렸대. 지금 그 부품이 없다고 주문해 놨대.'
'언제 고쳐진다든?'
'일단 부품이 언제 오는지조차 모른대. 오늘 오기를 희망한다나?'
계속 말을 시킬까봐 일부러 관심 없다는듯 대꾸해 줬다. 그 산적 드라이버는 심심한지 TV에 눈길을 돌렸다. 소리를 거진 죽인 화면에서 플로리다에 들이닥친 태풍을 비치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뉴스를 보며 'F*ck' 했다.
어지간히 수다를 떨고 싶은지 휴대폰에 말을 걸었다.
'헤이 시리, 여기서 오마하 네브라스카까지 얼마나 걸리냐?'
'여기서 오마하 네브라스카까지는 98 마일로 자동차로 1시간 반 걸립니다.'
'어, 고맙다!'
괜히 미안하다. 내가 영어에 익숙하기만 했어도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전문 분야가 아닌 스몰토크는 아직 힘들다. 게다가 그의 억센 남부 억양이 알아듣는데 어려움을 줬다.
그는 휴대폰으로 뭔가 동영상을 봤다. 스피커로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라? 한국어다! 그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너 다시 말해 봐.', '뭐 어쩌라고요.', '너 선생님한테 뭐 하는 짓이야!'
이런 막장스러운 대사가 한국말로 그의 휴대폰에서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구의 다른 드라이버가 라운지에 들어왔다. 산적과 거구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둘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에게 다행이고 텍사스 사나이에게도 다행인 상황이다. 나는 이제 안심하고 침묵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둘이서 수다를 떠는 와중에 TV에서 갑자기 한류스타들이 나왔다. 산적이 갑자기 수다를 멈추고 TV에 눈길을 줬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10명 넘는 무슨 보이그룹이 미국을 방문 했는가 보다. 미국 TV 쇼의 호스트와 게임을 하고 인터뷰를 하는 등의 장면이 나왔다. 산적과 거구가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 너 K-POP 아냐? 코리안 팝!'
'어, 잘은 모르는데 요즘 뭐 그게 인기라며?'
'아, 씨바! 그 여자 중에 블랙핑크라고 있는데, 걔들 진짜 끝장나게 춤춰. 걔들 다 한국 애들은 아니야. 리사라고 걔는 태국애고, 그리고 로제, 걔는 아마 호주앨걸. 워메, 그 여자애들 진짜 끝내주게 이뻐! 걔들 음악 끝장나게 좋더라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라운지를 나와 버렸다. 억센 남부 억양을 가진 산적 같은 사나이가 한류 팬이었을 줄이야. 나의 고정관념을 고쳐야겠다. 말끝마다 F*uck, Fuc* 거리는 미국 백인 마초가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걸그룹에 홀릭되어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랄 때, 한국은 후진국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선진국 중에 일원이 되어 한국의 대중문화를 그 원류라 할 수 있는 미국에까지 수출 중이다.
지금 이 상황이 참 재밌다. 김구 선생의 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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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하는데 삼일이나 걸렸다. 시동도 안 걸리는 트럭을 샵까지 어떻게 운반하나 궁금했는데 중장비를 쓰네. 회사는 브레이크다운 페이로 나한테 하루당 150 ~ 170불 정도를 지불할 거다. 인생을 낭비하는 대가 치고는 싸다. 이래저래 손해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