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가랑잎 2011-12-15
비가 내린 다음 날, 더 많은 가랑잎이 떨어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옷을 잘 챙겨입고 갈퀴를 들고 앞마당과 뒷마당에 떨어진 가랑잎을 쓰레기통에 담아서 뒷마당에 있는 텃밭에 쌓아 놓았습니다. 겨우내 눈에 덮인 가랑잎은 봄이 되면 좋은 퇴비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Deck 위에 떨어진 포도나무잎을 치우는데, 빗물에 젖은 포도나무잎이 Deck에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갈퀴로 굵어도 잘 안되고, 비로 쓸어도 잘 안 떨어졌습니다. 할수없이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서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그때 부엌에서 전화를 걸고 있던 아내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밖에 까지 들렸습니다. 유리문으로 아내를 쳐다보니, 아내는 발까지 구르면서 깔깔 웃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웃지?’
아내가 그렇게 유쾌하게 웃는 모습을 요즘 처음 보았습니다. 가랑잎을 모두 치우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따끈한 차 한잔을 건네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습니다.
“왜이래? 넋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으면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친구의 말이 요즘엔 나이든 남편을 젖은 가랑잎이라고 한데! ㅎㅎㅎ”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이 나이가 들면 젖은 가랑잎처럼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진데! ㅎㅎㅎ”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잘 안 떨어지던 Deck에 붙었던 젖은 포도나뭇잎이 생각났습니다.
“딱 맞는 말이네! ㅎㅎㅎ”
요즘들어 절실히 느끼는 것은 아내가 없으면 완전히 찬밥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면몰수하고 젖은 가랑잎처럼 아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요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나이든 아내들의 정신상태(?)입니다. 지난 11월 16일 KBS 저녁 9시 뉴스에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나이든 여성들의 72%가 “나이든 남편이 부담된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좋게 말해서 부담이지, 귀찮다는 말일 것입니다. 네 명중에 세명이 이젠 평생 함께 했던 남편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찾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이해는 되지만, 남편들은 야단났네!’ 생각했습니다.
슬며시 옆에 있는 아내를 곁눈질해서 봤더니
“왜 그렇게 봐? 뭐 찔리는 게 있어?” 라고 해서 진짜로 찔끔했었습니다.
물론 카나다와 한국의 차이는 있겠지만, 카나다 이민의 삶 속에서 아내들은 남편들보다 훨씬 더 일을 많이 하고, 또 속앓이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약간 과장됐겠지만, 오래 전에 친구에게서 듣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내는 살림하랴, 아이들 기르랴, 가계를 보랴, 시집신경쓰랴, 눈코뜰 사이 없이 일하는데, 남편은 Golf에 심취(?)해서 아내를 속상하게 했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가계에 담배가 떨어졌으니, 빨리 도매상에 가서 담배를 사오라고 부탁했답니다. 남편은 전에도 전과(?)가 있었던지라, 제발 딴데로 새지말고 담배를 사가지고 곧장 오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점심시간이 지나도, 저녁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더랍니다. 아내는 손님들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머리를 숙이고, 행여나 차사고가 난 것 아닌가 속을 태우며 여기저기 수소문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도매상에서 친구들을 만나 따~악 Nine hole만 치자는 유혹에 빠져 Golf장으로 향했고, Nine hole만 치자던 Golf는 Eighteen hole이 됐고, 한걸음 더 나가서 내기 Golf로 변했답니다. 게다가 일진이 좋지 않아서, 아내가 담배 사오라고 준 돈을 내기에서 모두 잃었다니, 아내의 속이 어떠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남편들이 방송을 보고 펄펄뛰었다는데요. 카나다에서 사는 남편들은 어떨까요? 저는 가만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아내는 28%에 들어갈까? 72%에 들어갈까?’ 몇일 전에 아침마당이라는 TV Program에 사이좋은 부부 네쌍이 나와 아주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태어난다면 또 부부로 만나길 원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명은 “네”라고 대답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어른신(82세)만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서 “아니~ 왜요?”라고 물었는데, 그 어르신의 대답이 제 가슴을 꽈~앙하고 때렸습니다. “여지껏 나하고 살면서 고생했는데,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나를 다시 만나면 그 고생을 어떻게 또 해! 내가 물러나야지!”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답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종종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살꺼야!”라고 아양(?)을 떠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내게 필요하니까, 또 다시 당신을 만나서 덕보며 살고 싶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때?”
“…… 나야 당신하고 다시 살고싶지……! 그런데 저 어르신의 말을 듣고 나니, 당신과 다시 살겠다는 말을 못 하겠네! 너무나 뻔뻔해서……”
“걱정마! 내가 다시 살아줄께!”
“……고마워~!”
정말 다행입니다!
아내가 다시 살아준다니 다행입니다!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젖은 가랑잎처럼 딱 달라붙어도 뜯어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