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가시던 날 2003-7-3
어머니! 주무시는듯 눈감으신 어머니를 바라 보았습니다.
숨결없으신 어머니의 얼굴은 거울에 비친 저희8남매의 얼굴이었습니다.
쪼글쪼글한 어머니의 배는 저희들의 고향이었습니다.
탄력 잃은 어머니의 젖무덤은 저희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가늘어진 어머니의 등은 저희들의 잠자리었습니다.
저희들을 기르시기 위해 온 사방을 걸어 다니시던 가늘어진 어머니의 다리.
밥을지으시고 빨래하시던 가느다란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보았습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따뜻함!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야! 이젠 내래 가야디…. 내래 가서 망냉이를 놓아 주야디” 하시더니
막내를 놓아 주실려고 가셨습니까?
어머니, 저는 아이 셋을 기르는데도 이렇게 힘드는데, 어머닌 어떻게 여덟을 기르셨습니까?
어떻게 여덟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공부시키셨습니까?
어머니, 저는 아직도 평남옥의 설렁탕 국물을 기억합니다.
막내를 낳으시고 젖이 안나와 애태우시던 어머니!
우유빛 설렁탕 국물을 잡수시고, 그게 금방 젖이되어 나오길 바라셨던 어머니!
설렁탕 국물에 밥을 말아 잡수시던 어머니가 저는 참 부러웠습니다.
입맛 다시는 자식들을 바라보시다가, 공기마다 설렁탕 국물을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
제가 자식을 길러 보니 그때의 어머니 마음을 조금 이해 할 것 같습니다.
끼니때면 먹을 것 걱정!
달이 바뀌면 월사금 걱정!
철이 바뀌면 교복 걱정!
해가 바뀌면 등록금 걱정! 입학금 걱정!
저희들이 커서는 시집 장가보낼 걱정!
시집 장가 간 후엔 손자 손녀들 걱정!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걱정이 아니였고,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야! 거참 쌔완하다! 쌔완하고 씨원하다! 어케 고렇케 잘 긁네?”
어머니, 이젠 어머니의 등을 긁어 드릴 수가 없네요.
“야! 네레 격어 보라. 내래 약을 두톨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재미였던 화토치기!
2불 50전 따시고 미안해 하시며 웃우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이젠 못 뵙게 됐네요.
“오마니 나 이제 가야 가씨요”
“기래 가서 한잠 자야 내일 일가디…”
“오마니 잘 주무시라요. 내래 또 올께요”
“기래 기래, 참! 거, 계란 잊디 말고 개 가라”
“저 번에 개 간거 아직두 있는데…”
“기래두 개 가라우~”
“기럼, 한줄만 개 갈께요”
“아니야, 세줄 개 가라~ 아덜두 많은데…”
“하나만 개 갈께요”
“아니, 길쎄, 세줄 개 가래두~”
“딴 아덜두 주야디요”
“딴 아덜 줄꺼 또 이써”
“오마니 고럼 두줄 개 갈께요”
“기래 고럼 두줄 개 가라”
“오마니 내래 갑네다”
“기래 내래 던화 안하갔다. 아에미 자는데…”
농장 갔다 오시는 길에 사오시던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계란을
이젠 먹을 수가 없게 됐네요
셋째딸이 파라통을 깔고 앉아 다치는 바람에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시고,
대신 태어나게 된 막내딸이 어머니을 마지막까지 돌봐드리고,
맏딸이 와서 일주일을 함께 있어드리고, 아들 딸, 며누리 사위, 손자 손녀들
다 보셨으니, 어머니는 참 복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몇 시간만 더 사셔서 끔찍이 생각하시던,
맏아들의 손을 잡아 보셨으면 좋으셨을 걸…
“오마니, 노래 한마디 해 보시라요”
“내래 아는거이 없어~”
“와, 없어요! 타박네 있자누?”
“이젠 다 니지 뿌렸어”
“기래두 한번 해 보라요”
“못한다구 웃디 말라~”
“고럼, 내래 와 웃갔소”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울멘서 어데 가네
오마니 있는 곳에 나 울메 간다
산이 높아 못 간단다 산 높으면 게어가디
물이 깊어 못 간단다 물 깊으면 헴헤가디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울멘서 어데 가네
오마니 있는 곳에 나 울메 간단다
제 기억엔 어머니께서 아시는 단 하나의 노래였습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님 품으로 가십니까?
저는 타박네를 들을때마다, 전해 들은 어머니의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여위시고 어린 남동생 하나 데리고 많은 고생하셨다던 어머니!
이제 우시는게 아니라 웃으시면서 어머님 품으로 가십시요
제가 타박네 가사를 다시 지어 드릴 테니까
활짝 웃으시면서 가십시요.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웃으멘서 어데 가네
오마니 있는 곳에 나 웃으메 간다
산이 높아 못 간단다 산 높으면 날아가디
물이 깊어 못 간단다 물 깊으면 날아가디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웃으멘서 어데 가네
오마니 있는 곳에 나 웃으메 간단다
새가 되고 싶으시다던 어머니!
훨~훨~ 날아서 어머님께로 가십시요.
훨~~ 훨~ 훨~~~ 훨~
꼬리 글:
지금부터 5년전, 어머님께서 82세를 사시고 저희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께서 떠나신 날,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어머님 생각을했습니다. 어머님 장례서류를 뒤적이다가, 장례식에서 읽었던 글을 보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어머니 생각이 더 나네요. 저의 어머님은 1946년 저를 낳으신지 20일만에 저를 업으시고 온가족이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걸어서 남한으로 내려오셨답니다. 저를 낳으신지 20일 후라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상상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낮에는 북한군에 붙잡히면 탄광으로 끌려갔다니,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 밤에만 걸었답니다.
‘어머니의 존재가 얼마나 크신가!’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느껴졌습니다. 어머님는 저의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살아계실 때 좀 더 잘해드릴 걸…” 후회를 해보지만 이젠 곁에 안 계네요.
어머님께 못다한 사랑, 자식들에게 쏟으면 어머님께서 흐뭇하게 미소지으실까요?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했으니….
늘푸른: 가슴이 저리는 글이네요.... 60이 넘으신 부모님을 뒤로 하고 이민 온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던데, 공항에서 끝까지 울지 않으시려고 애쓰시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저두 펑펑 울며 생각했습니다. 자식만큼 잔인한 건 없다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 뿌리를 내리고 하루속히 부모님을 모셔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처음인 곳에서의 시작이 쉽지만은 않네요. 이민생활이 사다리같다고 하신 님의 글이 제게 많은 도전이 되었답니다. 언젠가 이땅에서 부모님과 웃으며 예전을 기억할 날이 꼭 오겠지요? 그날을 기약하며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어진이: 늘푸른님, 안녕하세요? 나홍구님의 홈에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님의 Internet ID가 너무 좋습니다. 맑고 희망찬 삶을 살려고 애쓰시는 분 같은 느낌이듭니다. "어머니!" 모든 것을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속상할 때 떠오르는 분이 어머니이신 것 같습니다. 늘푸른님의 애뜻한 어머니에대한 사랑이 저의 어머니를 생각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푸른님, 이민은 나무를 옮겨 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옮겨 심은 나무들은 모두 다 일정 시간 동안 몸살을 앓습니다. 이민을 온 저희들 모두 옮겨 심은 나무들입니다. 얼마나 심하게, 오래 앓느냐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제경험으로는 몸살을 앓치 않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몸살을 앓지 않았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생각에는 그 사람은 어딘가 잘 못 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새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딴딴한 남의 땅에서, 다른 사람이 뿌리를 내려 주지 못합니다. 죽으나 사나 내가 내려야한다는데 고민도 있고 의미도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물 줄기를 찾아서 뿌리를 내리렸더니 먼저 있던 나무들의 텃새도 만만치 않습니다.
누렇게 시들어 가는 잎사귀, 힘없이 늘어지는 가지들이 참 애처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힘없이 늘어져 있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돋아납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물줄기를 찾아 밤낮으로 수고한 뿌리의 수고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저희들의 아이들이 힘겹게 일구어낸 열매를 맛보며 미소지을 날이 올 것입니다. "엄마, 아빠 고마워요!" 라고 이야기 하는 날, 아이들을 꼭 끌어 안고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꼭 올겁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서 알찬 이민의 삶을 역어가요.
이민의 삶!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부부가 서로 보듬어 주며 힘이되어 주면 해 볼만 합니다. 참 감사한 것은 어렵고 힘들었던 추억일수록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도리켜 보면 그 추억이 가장 반짝이는 아름답고 귀한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늘푸른님, 만나서 반가워요
건강하세요. 그리고 많이많이 행복하세요.
나홍구: 안녕하세요..어진이님,
무척이나 고향생각이 나게하는 글입니다.
제가 십여년 전에 외국에서 유학중 방학에 잠시 한국에 들렸는데 저희 어머니님 위암수술을 받으셨답니다. 그런데도 공부에 지장 있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몇달전에 그런일이 있다는것을 알았을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답니다. 그때 효도를 잘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지금은 건강하시지만 벌써 3년이 지난 이민 생활에 손주가 둘이나 있는데 부모님에게 아직 얼굴도 못 보여 드렸네요... 올해는 한국에 인사를 드리려 다녀 오고 싶은데..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가고 캐나다 생활에서 내 자식만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새삼 님의 글을 읽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은 전화라도 드려야 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진이: 나홍구님, 반갑습니다. 전에도 가끔 님의 홈에 와서 좋은 글, 유익한 정보를 살짝살짝 가져가다가 용기를 내서 글을 오려 봤습니다, 그런데 주책없이 제 이름이 너무 많네요. “야! 네가 홈페이지를 전세냈냐?” 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걱정도 됩니다. 이렇게 좋은 만남 귀하게 생각합니다. 건강하세요 온 가족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