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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들의 행진! 세이노의 가르침 - 4
작성자 외노자     게시물번호 16979 작성일 2023-04-26 04:27 조회수 1954

이건 그냥 심심해서 끄적거린 정제되지 않은 글입니다. 바쁘신 분들께는 일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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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됐을 무렵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모친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빈민가에 대지 16평짜리 집을 산 것이다. 평생 단칸방을 전전하다가 졸지에 홈 오너가 되었다.

 

쪽문같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정면으로는 마루가 있었는데 왼쪽이 안방이고 오른쪽에 코딱지만한 방이 또 있었다. 왼쪽 안방이 모친과 나의 거처가 되었다. 9시 방향에 안방과 연결된 암굴 같은 부엌이 있었고 그 뒤 7시 방향에는 또다시 코딱지만한 문간방이 있었다.

 

마당에서 오른쪽에 집안의 유일한 수도꼭지와 하수구가 있었다.

 

화장실은 다시 대문을 나가서 길가에 자그마한 쪽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낯선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항상 화장실에 자물쇠를 채워놨다. 화장실은 그냥 커다란 항아리를 묻어 놓은 것이었다. 큰 비가 오면 화장실 천정에 물이 줄줄 샜다. 그럴 때 큰일을 보면 응가가 풍덩 떨어지면서 빗물과 똥물이 섞인 물이 튀어올라 궁둥이를 적시기도 했다. 여름에는 악취를 풍겼고 바닥에는 구더기들이 드글드글 돌아다녔다.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나는 그 집에서 15년 정도 살았다.

 

코딱지만한 두 개의 방은 세를 주었다. 15년간 수많은 세입자를 겪었으며, 두말하면 입 아프겠지만,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든 방의 난방은 연탄 아궁이였다. 한겨울에 자리끼 삼아 머리맡에 놓아둔 대접의 물은 아침이면 꽁꽁 얼어붙어 마실 수 없었다.

 

나는 화장실 가는게 귀찮아서 소변은 수도꼭지 옆에 하수구에서 해결하거나 요강을 썼다. 같은 집에 사는 세 식구 모두 방 안에 요강을 구비하고 살았다.

 

지금 이렇게 쓰고 보니 참 구질구질 하다. 하지만 그 당시 그 동네에서는 그게 그냥 평범한 삶의 모습이었다.

 

항상 행복했던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가 왔다. 내게도 질풍노도의 시절이 잠깐 있었다. 한 열흘 정도 가출해서 여기저기 떠돌았다. 모친은 큰 결심을 하고 마루와 연결된 오른쪽 방을 나에게 내줬다. 평생 처음 나만의 방을 가졌다.

 

얼마 후 그 방에서 나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르륵 그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걸 새벽에 일나가던 세입자가 듣고 발견하여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머리가 많이 나빠져 학업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

 

모친은 없는 돈을 쪼개 내 방의 바닥 공사를 다시 했다. 연탄 아궁이를 메우고 PVC 파이프로 온수를 돌려 난방을 하는 연탄보일러로 바꿨다. 항상 겨울에 뜨거운 물을 데워 씻는게 귀찮았는데 난방용 PVC 밸브를 돌리면 더운 물이 졸졸 나와서 겨울에 세수하는게 참 편해졌다. 물론 그 온수에선 항상 강한 플라스틱 냄새가 가득했다.

 

이러나저러나 세월은 흘러 갔고 살림살이도 늘어났다.

 

처음 냉장고가 집에 들어와 마루에 자리를 차지했다. 가끔 세입자들이 자기네 상하기 쉬운 음식을 우리 냉장고에 보관하고 싶어 했다. 모친은 당연한듯 그 부탁을 들어줬다. 냉장고를 열어 보면 항상 세입자들의 음식이 여러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세탁기가 집에 들어왔다. 지금과 같은 통 하나짜리가 아니라 세탁용과 탈수용 수조가 따로 있는 세탁기였다. 세입자들이 간혹 우리 세탁기로 탈수를 하고 싶어 했다. 모친은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줬다. 어느샌가 우리 세탁기는 공용 세탁기가 되고 말았다.

 

세입자들 중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난다.

 

지금 기억에 아주 예뻤던 두 자매가 당시 사춘기가 되기 바로 전의 나를 무척 귀여워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자매는 우리가 단칸방 생활을 할 때 같은 집에서 세들어 살고 있었다. 모친이 집을 산걸 안 후 모친과 같이 살고 싶다며 우리 집에 세를 들어온 것이다. 그 자매가 나를 왜 그렇게 귀여워 했는지 모르겠다.

 

야하게 생긴 젊은 여자와 건들건들한 젊은 남자 동거 커플도 있었다. 어느날 내가 방학숙제로 라디오 조립 키트를 만들려고 납땜인두를 들고 쩔쩔맬때 야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이리 줘 봐!'

 

하더니 능숙하게 납땜질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햐~ 이거 되게 오랜만이다. 나 예전에 구로공단에 있었어.'

 

그녀는 납땜질을 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나에게 해 줬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 한방울이 기판에 뚝 떨어지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난 어찌할줄 몰라 하다가 슬쩍 자리를 떴다.

 

아주 늙은 부부가 아주 어린 딸과 살았던 적도 있다. 그 부부는 모친 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어떻게 그런 어린 딸이 있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 어린 여자애는 툭하면 쪼로로 나에게 달려와 나를 훼방 놓고는 했다. 특히 더운 여름에는 팬티바람으로 나에게 엉겨붙어 사춘기의 나를 무척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꼬마는 항상 나에게 시집 오겠다고 자기 부모와 모친께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 꼬마는 엄마와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새침한 10대 소녀가 됐는데 키가 훌쩍 자라서 나보다 커졌다. 그 애는 중학교때 성장이 멈춰버린 내 키를 보고는 나와의 결혼을 포기했을게 틀림없다.

 

코딱지만한 방에 대가족이 산 적도 있었다. 연로한 할머니와 부부, 그리고 장애를 가진 남자 한 명과 다운 증후군 꼬마애가 어떻게 그 쪼그만 방에서 함께 잘 수 있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 부부는 우리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 아침 일찍 나가 어딘가에서 팔고는 또 뭔가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나 들어왔다. 그동안 연로한 할머니와 다운 증후군 꼬맹이는 집에만 있었다. 그 꼬맹이는 항상 나에게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이 대가족은 모친에게 약간 골칫거리였다. 처음엔 부부와 아이 세 식구가 산다고 했는데 갑자기 곱추증을 가진 남자와 연로하신 할머니가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시판용 김밥을 잔뜩 만드는 일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여름에 상한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쥐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 할머니가 '아이고 이를 어쩌나!' 하며 안절부절했다. 그 부부가 만들어 놓은 김밥 10여줄을 빼놓고 장사에 나선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대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김밥을 팔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채 10분도 안되어 김밥은 다 팔렸다.

 

집 앞 골목길은 인적이 흔한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잡상인들이 돌아다니곤 했다. 집에 있으면

 

'고물 사요, 고물 삽니다.'

'신선한 계란이 왔어요, 계란.'

'개 삽니다~'

'칼 갈아요, 칼~'

 

같은 행상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 행상중 한명이 골목길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비정상인적인 상황을 감지하고 '오늘 만든 거라고요? 어떡하나?' 하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몽땅 사간 것이다.

 

우리집은 일종의 생활공동체였다. 어떤 집에서 순대를 만들면 다 같이 함께 나눠 먹었다. 또 어떤 집에서 토끼를 잡아 토끼고기 요리를 하면 나도 난생 처음 그 맛을 보곤 했다. 우리집에서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 아버지 제사를 하면 우리 세입자들도 동태전과 동그랑땡을 맛보는 날이었다.

 

세입자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들의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건 주로 나의 몫이었다. 간혹 귀가가 늦어지면 묻지 않아도 서로의 연탄불을 갈아줬다. 혹여 연탄이나 쌀이 잠깐 부족해지면 스스럼없이 서로 꾸고 꿔줬다.

 

우리집에서 한번 세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몇년에 한번씩 모친을 보러오곤 했다. 그래서 모처럼 모친이 쉬는 날에는 항상 손님이 오고는 했다. 나에겐 없는 이 능력이 궁금해서 언젠가 모친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네가 항상 약간 손해 본다는 기분으로 사람을 대하면 되여~'

 

내가 결혼할 때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모친의 하객중에서 많은 수의 과거 세입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심지어 나에게 시집 오겠다던 그 꼬맹이까지 완연한 아가씨가 되어선 엄마와 함께 결혼식장에 왔었다. 설마 자기 첫사랑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걸 보고 울지는 않았겠지.

 

모친의 영향이 컷겠지만 나는 빈곤 속에서도 무척 따뜻한 청소년기를 그 집에서 보낸듯 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마음이 훈훈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가난해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최소한 모친과 나는 그렇게 살아 왔다. 또 우리집에 세들었던 사람들도 가난했지만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쓰고서 이제 세이노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과 편견에 대해서 공격을 해야 되는데 그러기엔 내 마음이 너무 따뜻해졌다.

 

그냥 이 정도로만 하자.

 

그들도 보통 사람이다. 그들은 성격 파탄자라거나 게으름뱅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세이노 보다는 훨씬 따듯한 심장을 가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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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le5  |  2023-04-2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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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구 님의 "우리동네" 가 연상되는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문장력이 탁월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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