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자유게시판
친구에게 돈 빌리기! 세이노의 가르침 - 5
작성자 외노자     게시물번호 16994 작성일 2023-05-01 05:48 조회수 2147

이건 그냥 심심해서 끄적거린 정제되지 않은 글입니다. 바쁘신 분들께는 일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

 

한 5년 전에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갑자기 2만불 정도가 급히 필요한 일이 생겼다. 모든 자금이 묶여 돈을 동원하기에 여의치 않아 자칫하면 계약금 1만불 정도를 꼼짝없이 손해 보게 생겼다.

 

할 수 없이 몇 년 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 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야, 한 2,000만원만 잠깐 빌릴 수 있겠냐? 왜냐하면…'

 

'시끄럽고, 계좌 불러.'

 

간단히 해결됐다. 돈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던 아내가 나를 경이로인 눈으로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그냥 빌려 줘? 자기 친구들은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글쎄… 왜 그럴 수 있을까?

 

+++

 

사실을 고백하자면 난 중고등학교 친구가 지금 하나도 없다. 완전히 내 잘못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친구들을 통틀어 우리 모두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가 남부럽지 않게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툭 튀어나오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나 혼자만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신당동과 금호동 산동네 초입에 위치한 우리집은 일찍부터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주로 위쪽 산동네에 살던 친구들은 자기네 집으로 오르내리며 우리집을 한번씩 들려 놀다가곤 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이 친구는 인천에서 통학하고 저 친구는 미아리 산동네 살고 그 친구는 오금동 복개천 근처에 살고는 했는데 서울시 중구에 있는 우리집이 딱 중간에 있기에 술 처먹고 막차 끊어지면 자주 우리집에서 자고 가고는 했다.

 

필연적으로 중고등학교 친구와 대학 친구들이 우리집에서 얽히는 일이 많아졌는데 공통 화제를 못찾던 친구들은 서로 섞이기 어려워했다. 결국 동네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 오는 일이 점차 뜸해졌다.

 

결정적으로 여자 문제가 얽혔다. 동네 친구들의 여자친구 중 두 명이 나에게 동시에 대시를 했고 나는 그 중간에서 처신을 잘못했다. 나는 친구의 여자를 후리는 나쁜 놈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에 동네 친구들은 술자리에 점차 나를 부르지 않았고 길에서 스쳐도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지경이 되었다. 내가 참 큰 실수를 했다.

 

+++

 

80년대의 대학 문화는 짱돌과 최루탄과 술이다. 친구들과 울분을 토하며 또는 시시덕 거리며 막차가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잠잘 곳을 고민하는 학우들을 나는 비교적 가까운 우리집으로 데려와 재우고는 했다.

 

'누가 똥 훔쳐 갈까봐 뒷간에 자물쇠를 채워 놓냐? 븅신아?'

 

'훔쳐 가는게 아니라 더 채워 놓을까봐 잠궈논다. 멍청아!'

 

(세이노의 가르침 4편 참조)

 

그 기념비적인 우리집의 화장실을 보고서 어떤 친구들은 킥킥거렸고 어떤 친구들은 얼굴이 하얘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점차 우리집을 제집처럼 자주 오는 놈들이 결정됐는데 나까지 모두 여덟명이 됐다. 그리고 우리들의 공통점은 모두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이었다(한 놈 빼고).

 

모친도 점차 이 친구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술 처먹고 개처럼 취해 아침 늦게까지 자고 있노라면 모친은 내 옆에서 자고있던 친구중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당시 마당에 기르고 있던 개를 두들겨 팼다. 일 나가기 전에 아침 밥상이라도 차려 주고 싶어서 우리 잠을 깨우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친구들은 그 개가 자기 이름으로 불리며 깨갱거리는 걸 무척 즐거워했다. 두 명의 친구가 자고 있을 때 자기 이름이 안 불리고 다른 친구 이름이 불리면 서운해 하곤 했다. 결국 내 친구들도 모친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친구들이 군대 가기 전에, 그리고 휴가를 나왔을 때 모친을 보러 우리집에 오고는 했다.

 

그렇게 우리는 청춘을 공유하며 불알친구 아닌 불알친구가 되어갔다. 하지만 서로를 완벽하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던것 같다. 미아리 산동네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셔서 내심 사윗감으로 점찍었는데 친구 녀석은 자신의 예쁘장한 여동생을 나한테 넘기는 걸 결사 반대했다. 그 당시에는 그놈이 그리 얄미울 수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를 만나게 됐으니 지금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은 하나 둘 군대에 가기 시작했다. 군대를 면제받은 나는 어떤 의무감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논산이나 의정부 신병 훈련소까지 동행하여 그들의 빡빡머리 뒤통수를 보고 왔다. 그리고 방학에는 곧잘 면회를 가곤 했다.

 

강원도 양구에서는 한겨울에 얼어붙은 똥탑을 헤머로 치다가 그대로 외출 나와서는 똥냄새를 풍풍 풍기는 놈과 술 한잔 했다. 부대 복귀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잔뜩 취한 그놈은 똥냄새나는 군복차림으로 나를 껴안고 주절거리며 한참을 부대 앞에 서있었다. 그놈은 부대원에게 호모라고 소문났다.

 

강원도 현리에 입대한 놈에겐 내가 큰 실수를 했다. 둘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곤 여인숙을 잡아서 같이 잤는데 그만 복귀 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부대에 비상이 걸리고 고참들이 읍내 곳곳을 수색했다. 탈영병으로 보고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 우리들은 고참들에 의해 발견됐다. 그놈은 나 때문에 군생활이 꼬여버렸다.

 

당시엔 모두 괴로운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좋은 술안주가 되는 추억일 뿐이다.

 

내가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이 되어 고군분투할 때 녀석들은 모두 복학생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놈들의 물주가 되었다. 당시 급여통장은 모친이 관리하고 나는 용돈을 받아쓰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출장비와 잔업비가 쏠쏠하게 나와서 예전처럼 최루탄 냄새 자욱한 잔디밭에서 새우깡에 막걸리나 깡소주를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내가 일본을 왔다 갔다 할 때, 귀국할 때마다 양주 두 병 씩을 사오는 습관이 들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연락이 돌면 친구놈들은 당장 우리 집에 모여서 그 술병들을 따 마셨다. 맛도 모르면서 블렌디드위스키나 브랜디 등을 마셨다. 뭣도 모르고 사온 싱글 몰트 위스키는 모두 맛 없다며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마셔댔다.

 

세월이 흘러 그놈들도 졸업하고 하나둘 직장에 취직했다. 직업을 가졌다고 서로의 효용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대x건설에 입사한 녀석은 뜬금없이 x우자동차 할당량이 떨어져서 우리에게 차를 파느라 바빴다. 은행에 취직한 놈은 만날 때마다 신용카드 신청서니 무슨 적금 가입신청서 따위를 들이밀기에 바빴다. 모 재벌그룹의 it 회사에 들어간 놈은 같은 계열사의 보험 청약서를 내밀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부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공짜는 아니었던 셈이다.

 

점차 사회에 녹아 들어가며 서로 얼굴을 보는 횟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위안이 필요할 때, 바쁜 사회생활에서 잠깐 피난이 필요할 때 우리는 곧잘 만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순수했던 학창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모친이 입원했을 때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다. 이십여년만에 친구들을 본 모친은,

 

'너 머리카락은 다 어디갔니? 왜 대머리가 됐어?'

'아이고메야- 배좀 봐라. 애가 오늘 내일 나올라칸다. 너 살 좀 빼라!'

 

하며 오랜만에 본 친구들을 웃겼다.

 

모친의 장례식 때 친구들은 모두 빠짐없이 벽제 추모공원까지 나와 함께 했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한평생을 모친과 단 둘이 살았는데 모친의 장례식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많은 형제가 있었다.

 

+++

 

작년 12월에 나는 한국에 한달간 있었다. 근 7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나서 일주일 후에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남은 3주간 매주 만나서 함께 놀았다.

 

첫 주에는 문어와 가리비와 전복 등이 잔뜩 들어간 해물 요리를 먹었다. 2차로는 근처 바에 가서 위스키를 홀짝였다.

 

둘째 주에는 내가 먹고 싶어 했던 홍어 삼합과 홍어전과 해물찜을 대접 받았다. 어떤 놈이 카톡에서 '야 요즘 왜 발베니 구하기가 이렇게 힘드냐?' 라는 말을 하기에 남대문시장에 가서 두 병을 20여만 원 주고 사 갔다. 주인장의 허락을 받고 홍어와 함께 발베니를 즐겼다. 학창시절엔 그 맛을 모르던 놈들이 이젠 싱글 몰트 위스키를 일부러 찾아 즐기게 됐다. 2차로는 내 취향을 고려해서 골랐다며 라이브 재즈바로 끌려갔다. 레드와인과 여러가지 치즈를 라이브 재즈 음악 속에서 즐겼다.

 

마지막 주에는 몸보신 하라며 엄청 유명한 장어구이 집에서 푸지게 대접 받았다.

 

마치 내가 직장인 친구 여럿을 둔 복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벗겨먹을 수 있는, 그리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물주가 되어 줄 친구 여럿이 한국에 있다. 상당히 기분 째진다!

 

+++

 

한편 세이노의 친구관은 상당히 살벌하다.

 

우선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친구는 고등학교때 까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대학교에서는 진실로 친한 친구를 만들 수 없다고 본다. 전술했다시피 나는 중고등학교 친구가 전혀 없고 오로지 대학때 사귄 친구 뿐이다.

 

세이노는 당신이 부자가 되고자 할 때 친구가 가장 큰 방해물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부자가 되고자 노력할 때는 친구를 아예 만나지 말라고 가르친다. 실제 그는 자기 책상 앞에 '3분 이상 잡담 할거면 당장 떠날 것' 이라고 써 놓고 친구가 찾아오면 보여줬단다.

 

세이노는 부자가 된 후 친구에게 돈을 몇번 꿔 준 것으로 보인다. 단 공짜는 아니다. 담보를 받았으며 은행 수준의 이자를 받았다.

 

세이노는 돈 융통을 부탁하는 친구의 행동으로 그 친구가 장차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냥 친구니까 그저 돈을 꿔 달라고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을 못 봤단다.

 

담보나 각서를 공증받아 제공하고 이자를 포함한 상환 계획을 제출하면서 돈을 부탁하는 친구가 성공한다고 한다.

 

친구 부분에 있어서 세이노와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반대의 성향이다. 내가 현재 부자가 아닌 이유가 납득이 간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부자와 친구 중에 선택하라면, 약간 고민은 되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내 친구들을 선택할 듯 싶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참 행복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청춘을 공유한 나의 좋은 친구들로부터 많은 부분 유래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상상도 안간다.

 

(계속)

 


3           0
 
다음글 족구 동호회 팀원 모집합니다.
이전글 항공료는 못 뽑았지만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식료품, 주류, 식당 식..
  드라이브 쓰루, 경적 울렸다고 ..
  앞 트럭에서 떨어진 소파 의자 .. +1
  (CN 주말 단신) 앨버타 실업..
  (CN 주말 단신) 우체국 파업..
  “나는 피해자이지 범죄자가 아니..
  RCMP, 경찰 합동 작전, 수..
  연말연시 우편대란 결국 현실화 ..
  캐나다 우편대란 오나…우체국 노..
  주정부, 시골 지자체 RCMP ..
  현충일 캘거리 각지 추모행사 진..
  캘거리 트랜짓, 내년 수익 3,..
자유게시판 조회건수 Top 90
  캘거리에 X 미용실 사장 XXX 어..
  쿠바여행 가실 분만 보세요 (몇 가..
  [oo치킨] 에이 X발, 누가 캘거리에..
  이곳 캘거리에서 상처뿐이네요. ..
  한국방송보는 tvpad2 구입후기 입니..
추천건수 Top 30
  [답글][re] 취업비자를 받기위해 준비..
  "천안함은 격침됐다" 그런데......
  1980 년 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답글][re] 토마님: 진화론은 "사실..
  [답글][re] 많은 관심에 감사드리며,..
반대건수 Top 30
  재외동포분들께서도 뮤지컬 '박정희..
  설문조사) 씨엔 드림 운영에..
  [답글][답글]악플을 즐기는 분들은 이..
  설문조사... 자유게시판 글에 추천..
  한국 청년 실업률 사상 최고치 9...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