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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교를 꿈꾸는 사람들: 인간 상상력의 실험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1812 작성일 2009-10-19 23:33 조회수 2170
아래에 진행된 이단문제에 관련된 여러분들의 토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계시고, 기독교인이 아닌 분도 계시는데, 인식 공격적인 발언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진솔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어느 종교 웹싸이트보다 수준높은 모습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민감한 주제가 차분하게 진행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정치가 우리의 삶의 담론 (discourse)에서 분리될 수 없듯이 종교 역시 인간이 일궈내는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자제를 하고 신중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금기시된 정치나 종교 이야기가 우리네 삶의 생생한 드라마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대화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지요.

종교란 사회에서 일탈된 것이든 인간의 다양한 상상력의 표현입니다. 아래 글은 신종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하게 썼든 저의 글입니다. 알버타 저널에 실었던 것이구요. 아래서 제가 사용한 anti-cult movements란 새로운 종교를 비판하고 공격하거나 박멸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반신종교 운동과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의) 반신종교 운동을 말합니다. 더 세분하자면, 학자에 따라 다양하지만, 신종교가 사회적 규범을 위반하고 일탈했다는 전제하에 전제하는 반신종교 운동 (anti-cult movements)가 있고,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념으로 남의 종교는 무조건 이단이고 사교라고 비판하는 "반이단운동" (counter-cult movements)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반이단운동도 하나의 종교적 "현상" (phenomenon)으로 보고 연구를 하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극단적인 신념으로 타인이나 다른 집단을 공격하는 형태의 종교 근본주의나 정치 근본주의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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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교를 꿈꾸는 사람들: 인간 상상력의 실험

-아프리카


칼 맑스의 사상적 스승인 무신론적 철학자 포이어바하 (Feuerbach)가 말했다. 종교는 “인간의 꿈이 서려 있는 것” (Religion is the dream of the human mind)이라고. 종교를 인간의 ‘투사’ (projection)로 환원시킨 사람으로서, 그의 이러한 표현이 무척이나 ‘시적’ (poetic)이다. 신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완벽한 것, 절대적인 것이므로, 만들어진 신은 인간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화된 존재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 자신은 투사한 이 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신에 대한 연구는 소외된 인간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학이 된다. 포이어바하의 이런 무신론적 진술로 종교는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향해 간다. 이 마음의 순례의 중심에는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각자 이룰 수 없는 꿈을 간직하고 있으니까.

1. 종교란 꿈이 현재화되는 것
우리 인간이 꿈을 간직하는 한, 종교는 사라지질 않는다. 사랑하는 님을 먼 하늘로 보내고 그 그리움의 표현으로 그와 “영원한 지금” (eternal now)을 나누고 싶은 열망, 우주의 무한함에 압도되는 전율, 그리고 실존의 허무함과 무의미에 몸무림치는 그 자리에 인간의 꿈이 서린다.

종교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 현상을 “신의 존재” 유무로 환원시켜 버린다. 그러나 근본 불교 (Buddhism proper)에 신이란 개념이 자리잡고 있질 않다. 유교는 하늘의 뜻에 따라 경 (敬)의 삶을 사는 것이지 인격적 신이란 없다. 현대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뉴 에이지 (New Age) 관련 책들은 신조차도 인간 마음의 작용으로 간주된다.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가 사라질 지 모르지만, 새로운 영성, 새로운 꿈을 품는 사람에게 종교는 늘 삶의 현실로 다가온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동경하는 삶, 그곳에 새로운 종교의 열망이 시작된다. 종교는 인간이 궁극적 의미를 찾으려는 몸짓이며 마음짓이다.

2. 꿈의 비현실적 실현과 비극적 종말
이런 꿈을 꾸는 이에게 세상은 다시 보인다. 그런 ‘다시봄’이 집단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이것을 “신종교 운동” (new religious movements)이라 한다. 신종교는 기성 종교 (conventional religions)에 대비되는 말로서 새로 태어난 모든 종교를 말한다. 새로 태어나다 보니 어린 아이처럼 안정적이질 않다. 앞으로 갈 길이 막막하다. 이런 막막함이 비극적으로 자주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78년 짐 존스 (Jim Jones) 목사의 “인민사원” (Peoples Temple)에서의 타살 혹은 자살 사건이다. 원래 존스 목사는 기성 기독교 출신인데,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남미의 가야나 (Guyana)로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한다. 처음엔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중에 소수를 제외한 913명이 죽는 비극으로 끝난다. 1994년 몬트리올과 스위스에서 자살 또는 타살에 의해 수십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태양사원 기사단” (Order of Solar Temple) 이야기다. 그들은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을 승계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환상이며, 후에 한 행성으로 간다고 믿었다. 1997년 애플화이트 (Marshall H Applewhite)의 “천국의 문” (Heaven’s Gate)은 외계 세계의 외계인과 접촉을 시도한 사람들이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 사건이다. 이러한 의식 (ritual)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UFO로 옮겨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비극적 사건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이단 박멸이니, 사교니 하는 “반신종교 운동” (anti-cult movements)에게 큰소리 낼 수 있는 정당함 (legitimacy)을 주기도 한다. 갓 태어난 종교의 미성숙성, 또는 미숙함이 인간의 상상력에 공포감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런 미숙함은 신종교에 속한 사람에게 더욱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자신이 꾼 꿈이 비극적 종말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상징적 세계를 현실화시키려고 할 때 나타나는 비극들이다. 성숙함은 시간을 요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신종교들을 박멸하려고 해도 사라지질 않는다. 맑스의 종교는 인간의 소외 (alienation)의 고통을 잠시 들어주는 아편 (또는 진정제)이라고 하든, 프로이트의 인간 신경증의 드러남이건, 융의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건, 사람들이 꿈을 꾸는 한 종교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3. 신이교주의 (Neopaganism)가 주는 새로운 메시지
신종교 운동에서 신이교주의는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이교주의란 기독교가 이교주의 (Paganism)라고 부정했던, 고대의 종교로 돌아감을 의도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2천년 기독교 역사는 비기독교적인 것, 즉 이교적인 것을 제거하는 역사였다. 신이교주의는 바로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사람들의 영성에 주목한다. 기독교가 제거한 여신 (goddess)에 대한 관심, 자연을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것, 모든 사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신이교주의의 기본 강령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조화롭게 균형이 잡혀 있다. 그런데 현대 세상은 그 조화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부모는 아이로부터, 인종과 국가도 각자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분리로부터의 극복은 모든 사물이 본질적으로 질서 잡혔던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 가는 것,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들에게 중앙집권적인 교회도 없고, 인간을 교리로 가두는 교조주의도 없고, 교리를 가르치는 직업적인 성직자도 없다.

이처럼 신이교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떠나 새로움을 더하는 서구적 영성 운동이며 기성 종교를 해체하는 새로운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동안 기독교가 주지 못한 자연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를 안겨준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일부이며, 지구는 인간을 키워주는 어머니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이교주의 운동이 2천년 기독교의 지배 (Christendom)를 극복하고 완전히 새로운 영성을 구축할 수 있을까? 해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 없듯이 우리는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고, 잊혀진 과거를 재현하고, 또 미래를 향해 새로움을 창조할 뿐이다.

신이교주의가 주는 교훈은 어떤 종교도 세계를 절대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종교의 등장은 기성 종교가 주지 못하는 것을 채우는 틈새 시장이라 할 수 있다. 이 틈새 시장조차 죽이겠다는 이단 사냥은 신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더욱 더 꽁꽁 숨어 지하로 숨어들게 한다.

4. 새로운 종교에 대한 태도: 지평선 저 너머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펼쳐지는 실험장이다. 그 상상력이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면 자기 파괴적인 종교로 발전하고, 그 상상력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제한하면 종교 독단론 (dogmatism)이 된다. 전자가 신종교에 속한 것이라면, 후자는 정통주의 내지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도를 넘어서면 자기 파괴가 되듯이, 너무 제한당하면 교리의 껍데기만 남게 된다. 우리는 그 상상력의 기로에 서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상상력의 과잉 (신생종교)이나 박제화된 교리에 갇혀 있어서 상상력의 결핍에 허덕이는 종교 (정통주의)라는 두 극단의 지점에 우리는 서 있다. 우리가 어느 극단에 발을 내디디건, 위험하다.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우리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게 해 준다. 이제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과 들판과 드넓은 지평선을 볼 때다.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신종교의 통제되지 않은 상상력에 빠진 사람들은 지평선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지평선은 멀리 넓게 보는 것임과 동시에 나의 한계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종교인이라면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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