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을 올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Clipboard님의 저의 글에 대한 문제제기는 다음의 저의 글이 더 설명이 될 듯 싶어 올립니다. 레위기의 문제는 단순히 제사장 계급의 산물로 보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일상화시키는 과정의 산물 (즉 제도화)라는 측면에서도 보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모세) 오경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죠. 사회가 안정될 수록 사회의 통제 메카니즘은 더 정교화되고, 이 메카니즘에 대한 위반은 사회적 처벌을 불러 옵니다.
* 사회조직의 운동 (movement)에서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로 나아가는 딜레마에 대한 논의는 사회학자 Thomas F. O'dea의 책 [Sociology and the Study of Religion)의 제 11장 "Five Dilemmas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Religion"을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캘거리 사회에서의 이단논쟁도 그런 메카니즘의 일부라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글의 첫 부분은 사회일탈 (deviance) 이론에 대한 설명이고, 후반은 이러한 기존의 일탈의 개념에 수정, 또는 개혁을 가하는 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오래 전의 글이지만, 제 글을 통해서, 이런 논의가 종교적 진술이라기보다는 사회를 보는 시각의 다양성의 일부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낙인 찍기와 죄인 만들기
- 아프리카
1. 혼돈에서 질서로의 전이는 자연스런 과정
지난 번에 우리는 레위기를 통해서 어떻게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종교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성서에 많이 나오는 “거룩한” (holy), “깨끗한” (clean), “순수한” (pure)이라는 표현들과 이와 정반대의 “속된” (profane), “불결한” (unclean), “오염된” (polluted) 등의 표현은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해 나가는 방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있을 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은 순수하고 깨끗하고, 제 자리를 벗어난 것은 오염되고 더러운 것으로 사람들은 인식합니다. 사람 몸의 경우, 가장 불결하고 더러운 것으로 분류된 것은 나환자들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몸에 대한 통제는 격리를 통해서 일반인과의 접촉을 막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한국의 소록도라는 나환자 촌은 나환자를 치료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정상적인 사람들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한다는 사회적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입니다.
이런 질서는 우리 삶의 곳곳에 묻어 납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갈 때 현관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가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흔하지 않게 우리가 열쇠를 두고 나와서 하는 수없이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는 대부분 도둑입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화장실, 부엌, 침실, 서재, 거실 등의 위치는 우리가 그 동안의 집에 대한 모든 정보와 경험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한국에 풍수 지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풍수지리를 미신의 일종이라고 간주하였는데, 서울대 지리학과의 최창조라는 분이 나와서 풍수의 새로운 이해를 도왔습니다. 풍수는 단순히 좋은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흔히 명당자리라는 것은 바로 풍수지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에 정한 것이나 유명한 절터나 왕릉은 바로 이런 풍수지리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좋은 곳과 묻히기 좋은 것을 찾는 것은 꼭 풍수지리를 논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 자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달라고 하는 것은 죽어서 따뜻한 곳에 편히 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땅이 진짜 따뜻합니까? 아닙니다.양지 바른 곳이라는 것은 이미 땅이 우리의 삶의 의미 체계 속에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곳에 묻히길 원하십니까?
죽어서도 마음이 편안한 곳에 묻히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삶에서 죽음까지 얼마나 우리에게 풍수가 주는 상징적 질서가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혼돈보다는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의 세계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미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삶의 우주”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제법 고상한 말을 붙여서 “상징적 우주” (symbolic cosmos) (Peter Berger)라고 합니다. 우리의 정치활동, 종교활동, 사회활동 모두가 촘촘히 분류된 상징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만날 때, 의식을 하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실 때,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킨 다음, “크, 좋다!”라는 말을 붙여야 술 맛이 나고, 숭늉을 마실 때, “후루룩” 소리를 내야 마신듯한 느낌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소리내서 커피를 마시거나 스파게티를 먹을 때 소리를 내면 매우 교양없는 사람이라 말할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이상한 행동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막걸리와 숭늉을 어떻게 마시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캐나다에서 이런 일을 반복하면,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 말도 크게 하고, 음식 먹을 때 소리를 크게 내는 교양없는 인간들이야!” 서양인이 한국에서 이런 말을 했다간 당장 쫓겨 나겠지만, 백인이 다수를 점유한 캐나다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교양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가 자연스런 질서로 받아 들여지지 않고, 싫어하는 다수나 힘센 엘리트 그룹이 자기 식으로 딱지를 붙이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힘센 엘리트나 다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고 분류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에서 옛날에 “빨갱이”라는 낙인은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강력한 무기” (potent weapons)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빨갱이는 공산주의, 공산주의는 체제전복을 의미하고 체제전복자는 처형이나 격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로 발전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인민혁명당, 즉 인혁당 조작 사건은 바로 이런 “빨갱이” 딱지 붙이기의 비극적 사건입니다.
다수가 주축이 된 문화를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문화를 위반한 사람을 사회학에서는 “일탈자” (deviant; 이상성격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류에서 볼 때, 바른 길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가 길을 벗어났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데, 다수자는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질서를 벗어난 사람은 다 일탈자로 쉽게 낙인 찍을 수 있습니다.
2. 예수는 경계를 깨는 “회색분자?””
우리가 이런 낙인에 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다수나 엘리트 계급이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질서나 사물 인식은 영구 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질서를 위반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식일도 어기고, 죄인들로 낙인 찍인 사람들과 함께 식사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기존의 질서를 뒤흔든다는 것은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질서를 향한 개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출발점은 누가 복음 5장 32절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죄인들은 29절의 “많은 세리들과 그밖에 여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선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이라고 규정당한 사람들에게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리와 주변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천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죄인들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과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예수님도 같은 “패” (부류) 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누가 복음 7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라는 비난을 듣습니다. RSV 성서는 더 분명합니다. “Behold,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저자 좀 봐라, 먹보에, 술주정뱅이에다가 , 세리와 죄인들의 한 패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테두리 (boundaries)에 맞지 않은 것 모든 것은 죄이고 나쁜 것입니다. 이렇게 울타리가 튼튼하고 높을수록 자기들의 울타리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의 부류, 즉 죄인들은 많아 집니다. 그래서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 정권일수록 법이 엄합니다. 70년대에 한국에서 머리만 길면, 장발족이라고 무조건 벌금을 물거나 강제로 잘렸습니다. 여자들의 미니 스커트의 길이를 경찰들이 자로 재면서 단속을 했습니다. 대중가요 카세트 테잎에는 반드시 한 곡식 “건전 가요”라는 것을 수록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면 타락한 가요에 적어도 독재정권이 분류해 준 건전한 가요가 하나씩 수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울타리는 종교에서도 있습니다. 정통주의자들에게 성서를 조금만 틀리게 해석해도 이단이고 자유주의잡니다. 동성애자는 두말할 것 없이 죄인입니다. 이것을 사회학에서는 “울타리를 유지” (boundary maintenance)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울타리는 자기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꼭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사경 (mirror image)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또 다른 이미지를 비추는 것이 바로 죄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자기 정체 (identity)는 그들이 비난하는 죄인들을 비춤으로써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죄인들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도 문제입니다. 사회학에서 “낙인찍기 이론” (labeling theor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상적인 사람도 좀 이상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거나 극도로 긴장해서 갑자기 히스테리칼하게 되거나 자신도 모르게 상점에 물건이 탐난다고 훔치는 수도 있고, 호기심으로 마리화나를 한 두 번 피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성격이나, 절도, 또는 약물 복용이 일시적으로 끝날 수 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서 “저 놈은 정신병자다, 저 놈은 절도범이다, 저 놈은 약물 남용자”라고 낙인이 찍혀 비난을 받으면, 이 사람이 진짜로 자신도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여 진짜 성격이 괴팍해지고, 상습 절도범이 되거나 약물 남용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낙인이론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보면서 죄인들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낙인 (stigma)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자아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상/비정상이라는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두 선명한 경계선을 흐려 놓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죄인으로 분류된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식사까지 함께 하는지 묻고, 예수님의 약점을 잡아 내려 합니다. 예수님이 이 경계선을 흐려 놓은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 위협이 됩니다. 이러한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행위는 바로 누가복음 15장 1-2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식사를 그냥하는 것이 아니고 “환영해서” (receives; welcomes)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어 놓은 사람들이 영원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울타리치기가 오히려 더 허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새 질서
그러면, 예수님이 항상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율법을 어기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라는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울타리는 무한정 커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어집니다.
그러한 울타리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 즉 사랑의 율법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6-40에서 새로운 계명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정죄 당한 사람들을 환영하면서 함께 식사 나누는 일이 결코 질서를 파괴하려는 예수님의 본 뜻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도 (new maps), 새로운 울타리 (new boundaries), 새로운 규칙 (new rules) 을 만드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사도 바울은 온갖 고초와 고난과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지도 (map)를 보고 형극의 길을 따라 진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 체험한 것을 고린도 전서 13장에 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의 실천 원리입니다. 이런 계명의 세계에서 살 때, 우리는 결코 삶의 공허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삶을 넘어 죽음 저편까지,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곳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의 삶을 넘은 그 곳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함께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바로 지금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낙인 찍어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함께 식사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 즉 구원의 질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울타리는 얼마나 크고 넓은지......
References
1. Barclay, John M. “Deviance and Apostasy: Some Application of Deviance Theory to First-Century Judaism and Christianity.” In Modeling Early Christianity: Social-Scientific Studies of the New Testament in its Context, edited by Philip F. Else, 114-127. London: Routledge, 1995.
2. Erikson, Kai T. Wayward Puritans: A Study in the Sociology of Deviance. New York: John Wiley & Sons, 1966.
3. Neyrey, Jerome H. “Clean/Unclean, Pure/Polluted, and Holy/Profane.” In The Social Sciences an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edited by Richard Rohrbaugh, 80-104. Peabody, Me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