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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생존이여 |
작성자 민초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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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3130 |
작성일 2010-09-24 06:54 |
조회수 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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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
주 " 이 작품은 언젠가 내사랑아프리카님이 생존에 대한 질문에
관한 답시입니다 즐감하시기를 바라면서
"오 생존이여"
내가 나를 모르면서 살아온 나날이여
나는 너를 알지 못 하고
알 수도 없는 기이한 나날을 살아왔다
모순에서 절박히 이어지는 세월
하루의 안식이 너무나 힘이 들어
숨을 헐떡이던 때
어떤 순간은 이름 모를 새가되어
날개를 펼쳤고
어떤 계절에는 열리는 듯 떨어지는
가을 하늘을 보며 말했노라
사랑이 없는 존재의 꿈을
허무에서 오는 저 한계의 노을 빛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죽음의 저항을 누군들 알 수 있을까
'나의 노래'
지금까지 내 생존의 뒤안길을 보니
내가 소유한 것은 얼굴 주름살
대머리 되어가는 허허벌판의 두상
여기 저기서 찾아오는 지난 날의 회한들
읽지도 못하고 애처러히 꽂혀있는 책
그리운 사람 떠나간 빈터
이렇게 나의 현 주소를 본답니다
남앞에
내 양심 들녘같이 내어 놓고
뜨겁게 사랑해 주지 못한 아쉬움들
그래도 사람들은 사랑과 기쁨을 주고
하루 하루 숨을 쉬게 하는 저 맑은 공기 속
오늘도 사랑을 찾으며 살아가는 허수아비
세월의 그리움만 안고 하루를 넘깁니다
갈대밭을 헤매며 허기진 이상의 꿈을
비우고 비우고 비워 내어도
바람은 어이 그리 차고 모질기만 한지
미로위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향내
진한 핏방울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승 떠날 때 남기고 갈 것 하나 없는 나의 노래
잠시 쉬어가는 이 거친 숨소리
누군가에게 주고 가고 싶은 나의 노래
그림자도 없는 이 슬픈 나의 노래를
어디에 숨겨놓고 길을 떠나야 한답니까
07-27
내사랑아프리카
민초시인님, 안녕하세요.
이런 질문 드려도 될지요...민초시인님의 대부분의 시에는 거의 항상 "생존"이라는 시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좀 오해했었습니다. 아직도 생존이라는 시어가 고백적인 시어로 나와야 될까? 그 생존을
외치는 주체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생명력의 한 양상을 넘어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긴 삶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존재에의 의지 (will to be)
라는 더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이 맞는지요?
오늘 시에는 삶의 활력보다는 관조와 기억, 회한의 의미찾기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는군요. 인생은 연륜과
상관없이 완결될 수 없기에 미완성으로 밖에 남길 수 없다는 것. 그런 아쉬움이 절절하게 들리는군요.
생존의 이미지가 주는 시는 어떤 형태든 자기 고백적일 수밖에 없고, 시간의 불가역성은 공간적 빔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을 이 시에 반영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저도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반공주의" 문학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주제와 상관이 없는 부분을 빼고 1권을 마치고
두권째 읽고 있습니다. 반공주의와 순수문학의 상관성도 볼 수 있었습니다. 반공주의와 민족문학의 상관성에
대한 발견은 의외였습니다. 시대는 흐르고 사물을 보고 경험하는 시각과 이념, 그리고 그런 이념을 구성하는
말 또는 시대적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지금 신문에 연제 되고있는 민초시인님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대한 두번째 글을 감명깊게 읽었으며 세번째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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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09-24 16:19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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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님, 안녕하세요. 제 필명이 \"내사랑아프리카\"이니 다음에도 \"내사랑아프리카\" 또는 \"아프리카\"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송하고 또 새삼스럽게 제 댓글을 퍼 올려 주시니 지금 밖에 나가야 되지만, 제 생각을 주제넘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민초님의 시들 전반에 흐르는 생존의 모티브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이민지에서 살아 남는 것은 물론 산다는 의지는 누구나 가져야 하는 중요한 삶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생존에의 의지가 없다면 자기 몸을 해하거나 심하게는 죽음이 삶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생존이란 개인적인 분투를 넘어 사회적인 것이며, 그래서 생존은 항상 나눔 (sharing)과 섬김 (service 또는 commitment)이 동반될 때 바른 가치를 유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내심 이 부분에 저는 민초님의 시들에서 가지는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타자의 삶에 연관 (engagement 또는 involvement)을 가질 때만 우리의 시정 (詩情)에 공감 (sympathy) 그리고 함께 아파하고 느끼는 것 (compassion; 자비; 함께 느끼고 아파하고 기뻐 하는 것)이 형성되겠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타자의 생존에 대한 나의 염려와 참여도 동반될 것입니다. 그러할 지라도 타자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타자는 나의 나됨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하며, 타자 또한 나의 삶에 관여하고 나의 삶을 공감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는 상호성에 기반할 때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민초님께서 생존의 언어 이면에는 타자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인연이 단순히 하나의 댕기 줄이 아니라 그물코처럼 얽히고 섥혀 있다는 인연임을 감안한다면, 생존의 언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저는 시를 잘 모르며 인생의 연륜 또한 짧지만 대상으로서의 타자, 그리고 “다른 나”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고려는 우리의 시를 더 풍요롭게 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는 내가 타자와 깊이 연관될 때, 죽음을 넘은 삶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적 애국심에 기반한 순국 열사나 민중 민주를 위해 몸을 버린 열사들의 죽음은 바로 죽음을 넘은 삶, 즉 타자의 삶을 통한 부활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또는 베르테르의 번민은 바로 이런 타자와의 만남의 나이브한 본능적 표현, 또는 낭만적 형성화이듯이 말씀이죠.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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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 2010-09-24 21:18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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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님 젊었을 때 무역을 한답시고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카메룬이라는 나라를 여러번 갔었는데 아프리카라는 닉이 참 인상적으로 각인됩니다.
위의 사유깊은 글 잘 읽었답니다 민초 들풀이란 시제의 작품 한점 발표합니다.
\"들풀\"
들꽃으로 살으리
들에 핀 꽃잎이 떨어진다
다시 피어날 날을 기다리며 들꽃이 떨어진다
여름 한 철 울어주던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 소리도 길 떠나고
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 옷깃을 스친다
살아온 날들 뒤척이면
앞 날을 위한 인고의 생존에서
뒷 날을 반추하며 하루를 넘겼고
낮 보다는 밤의 정막이 좋았다
남 앞에 우뚝 서는 것 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좋았고
하늘 높은 곳에서 살기보다
땅에서 소박한 생활을 함이 좋았다
죽어서 천년 만년 살고
하늘 나라에가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말보다
불행하더라도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고
그믐밤에 달빛에 가린 달보다
오솔길에 피어난 들꽃으로 살고 싶었다
오늘도 지평선에 피어났던
들꽃들이 소리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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