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본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영화를 소개합니다.
옛날엔 보다가 말았었는데, 이 번에 보니 깊이 감동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렇게 수학도 사랑할 수 있구나 하는 영화구요. 영문 제목은 [The Professor and his Beloved Equation]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원작에는 없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첫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번역은 누가 했는지 모름>
영화 감독이 원작에 없는 이시를 인용한 것은 마치 수학 공식이 갖는 순전함과 블레이크의 위의 시와 대비될 수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영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영문 제목은 [The Housepkeeper and the Professor]입니다. 캘거리 공공 도서관에서 6권 정도 있습니다. Crowfoot Library에도 있습니다. Fair's Fair에 연락해 보니 있다고 해서 저는 7불 50 정도 주고 샀습니다. 처음엔 1장 만 보려다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후다닥 끝냈습니다. 영화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했는데, 원작에서 교수가 열광한 야구에 대해서는 많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원작자인 일본인 여류 소설가 Yoko Ogawa가 재미없을 수학적 내용을 소설에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것도 놀랍고 그녀의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도 놀라게 됩니다. 특히 원작 소설에서요.
한글번역도 있군요.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유튜브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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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은 네명입니다 (위의 유튜브 서평자는 3명이라고 하지만). 교통사로로 기억을 80분 밖에 못하는 캠브리지 출신의 천재 "교수" (이름없이 교수로만 불려짐), 엄마도 미혼모였고 자신도 미혼모로서 먹고 살기 위해 파출부로 일하는 1인칭 화자인 나, 그리고 나의 아들 (이름은 없고 교수가 지어준 별명인 수학 기호인 Root) 그리고 교수의 형수 (sister-in-law)인 여인. 모든 등장 인물이 불완전한 인물들인데,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은 완전한 실재로서의 수학의 본성과 대비됩니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불완전한 이 4명의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할 때, 시공을 넘은 수학공식처럼 삶의 순일성 또는 전일성에 이를 수 있다는 암시도 있습니다.
여기서 교수와 형수의 관계는 마치 전체 이야기에서 엄청 중요한 것 같은데 작가는 흘려가듯이 서술해 놓습니다. 주인공인 미혼모인 나는 교수의 집 청소하면서 그가 옛날에 모아 둔 야구 관련 엽서카드 아래의 비밀 함에서 교수가 적어 놓은 글을 발견합니다. "For N, with my eternal love. Never forget." 여기서 N은 교수의 형수입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일본 전통극 관람하면서 손을 조용히 맞잡는 것으로 서로 애정 관계를 갖고 있다는 암시로만 나오죠. 소설에서는 이 여인이 등장하는 것두어 번.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소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에서 두 사람이 인간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마치 한 때는 불륜 관계였었는지 모르지만 교통사고 이후 두 사람은 지켜만 보며, 이데아적 사랑으로만 남는 관계같은 암시만 줍니다. 애정의 추구가 무시간적 비공간적인 수학 공식같죠. 설령 두 사람의 관계가 재현된다 하더라도 교수는 사고 이전만 기억하고 그 이후는 80분만 기억하기에 이것이 주는 애정의 비시간성 (atemporality)도 매우 중요한 상징이죠.
그 다음 "나"와 교수와의 관계도 애정 관계로 발전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파출부와 교수와의 형식적인 관계인지 작가가 구체적으로 적지 않습니다. 교수가 번민할 때나 병으로 아플 때 내가 교수의 어깨나 등을 쓰다듬어 주는 선으로 끝이 납니다. 마치 삶이 불완전하듯 사랑 또한 그런 불완전함을 암시하니 서로를 지켜 보아 주는 듯한 관계로 남습니다. 이 또한 수학이 마치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존재하여 인간의 역할이란 신이 빚어놓은 수의 실재를 발견하는 것 뿐이라는 교수의 발언처럼 말이죠.
또 한가지 교수와 나의 아들인 루트 (Root)의 관계에서 교수는 철없는 나의 아들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풉니다. 그는 아이에게서 마치 수학적 완전에 이르는 가능성을 발견하듯... 역으로 루트는 교수가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끝없이 반복되는 동일한 질문도 잘 참아내는 성숙함을 보여 줍니다. 마치 그의 불완전함 속에 수학적 완전함과 같은 애정을 발견하듯이..
소설과 영화에 나오는 수. 나의 신발 크기 220과 교수가 수학 잘한다고 받은 시계 번호 284
각각 자신을 뺀 약수를 더하면 다른 상대방 수와 같이 됩니다.
220: 1+2+4+5+10+11+20+22+44+55+110=284
220=142+71+4+1: 284
이것을 교수는 "amicable number" (우애수)라고 부릅니다. 교수는 여인의 신발 싸이즈와 자신의 시계 수의 우애수를 통해서 관계적 완전함을 발견합니다. 220과 284는 자기를 빼고 합치면 타자의 수와 일치합니다. 타자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이데아적 세계 (수학적 세계)가 될 수 있겠죠. 시쳇말로 플라톤적 사랑이란 수학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직 그 사랑은, 신 (God;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실재의 완전함을 상징)이 만들어 놓은 수를 인간이 발견한 것이듯, 수학적 또는 이데아적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겠죠.
위의 것은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지만 불레이크의 위의 시를 영화 감독이 원작에도 없는 것을 왜 가져 왔는지 상상할 수도 있을 것같습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심각하게 하게 생각하는 나이는 40대부터가 아닐까여? 40까지는 정신없이 살아 왔지만, 자기 목표를 성취를 어느 정도 했건 안했건 시간은 멈출 수 없기에 40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성찰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닐까요? 이 영화나 소설은 바로 내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 나의 사랑과 신념, 나의 성취와 실패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완전해도 이데아적 사랑의 세계에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은 꿈이지만 시간을 뛰어넘는 행복한 망상 또는 몽상입니다. 저는 이 망상이 주는 여운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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