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따먹기: 가나안 정복, 약속의 땅 그리고 봉은사 땅밟기: 착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예의 범절 교육 시급
1. 봉은사 땅밝기
일명 “땅밟기”로 알려진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한 기독교 단체 소속 몇 명이 기독교식 예배를 보면서불교를 폄훼하는 내용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이 땅밟기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다른 종교 폄훼는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탈출 한 후 가나안 정복의 시초로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장면에서 근거를 찾는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면서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아무런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리고성을 7바퀴를 돌자, 엄청난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 우리도 사찰을 돌며 기도하면 사찰이 무너지고, 불교 신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2. 가나안 정복과 약속의 땅
히브리 성서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틀은 출애급 사건입니다. 출애급 사건이란 에집트의 노예로 있던 히브리인들이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입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해방신학자들에게 중요한 해방신학적 준거틀을 제시해 주었으며, 일제 식민지 하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식민으로부터의 희망을 주었으며,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에게 역시 출애급 사건은 중요한 사회적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누가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혀집니다. 노예들의 출애굽은 이제는 가나안 입성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장 17절에서 야훼 하나님은 “그리고 너희를 이집트의 억압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입성은 가나안 정복입니다. 출애굽기 23장 30-33절은 끔직합니다.
“너희가 번성하여 그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두고두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리라. 나는 너희 땅의 경계를 홍해에서 불레셋 앞바다까지, 이 사막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로 정하고,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리라. 너희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리라. 너희는 그들이나 그들의 신들과 계약을 맺지 마라. 그들로 하여금 너희 땅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가 그들의 유혹에 빠져 그들의 신들을 섬기며 나에게 죄를 지을 것이다.” (신 7:1-2 비교)
흔히 우리가 말하는 가나안이란 약속의 땅은 정복의 땅입니다. 종교 포교도 종교라는 남의 영토를 정복하는 것으로 현재 기독교인들에게 간주됩니다.
3. 피정복자 팔레스타인과 네이티브 어메리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출애급은 해방이 아니라 정복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에게 출애급 사건이 정복과 억압으로 읽힌다는 것은 그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대상은 네이티브 어메리칸들에게도 출애굽 사건은 공포의 이야기가 됩니다. 즉 출애굽 이후의 가나안 정복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이듯, 유럽인의 아메리카 진출은 원주민들에 대한 정복사이니까요. 유럽인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신대륙에 건너와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희망과 꿈을 성취합니다. 실제로 퓨리탄적 설교자들은 네이티브 어메리칸들을 가나안인으로 동일시하고, 개종하지 않으면 멸종해도 된다고 보았습니다.
4. 영적 정복자: 개신교도들
여전히 개신교도들은 선교를 영적 승리이며, 타종교 정복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사찰 땜에 재난이 일어났다거나 미얀마에 가서 스님들이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심지어 찬송가 38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를 부릅니다. 여기에 타종교나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개신교도들이 원하는 것은 타종교가 망하고 무너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결국 땅따먹기를 해서 기독교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주 목적이 됩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통해서 바른 인간이 되는 것일 터인데,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심지어는 자국민을 이주시켜 식민지를 만들었듯, 선교의 제일 과제가 영적 정복이 된듯합니다. 결국 기독교 식민지 (colonies)를 건설하는 것이 선교가 된 셈입니다.
5.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예절 교육부터 시켜야
현재 한국 교회에서 시급한 것은 예절 교육입니다. 예의가 얼마나 없느냐 하면, 가히 망나니 수준입니다. 우리가 근래에 장경동, 신일수, 김성광 목사같은 사람들이 나와 타종교를 자연스럽게 폄훼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개신교도들 중 망나니 교육을 받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니라 목사들까지 망나니가 되어 다른 종교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러니 봉은사 땅밟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이 없던 때엔 개별 교회에만 알려 지던 것이 인터넷 이후 대중적을 알려지게 되었을 뿐입니다. 제 짐작컨대 종교개론 101의 소양도 없는 교역자들이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지막지한 영적 테러리스트들이 교회 지도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암담합니다. 신학교부터 개별 교육까지 “종교개론 101” 교육이 시급합니다.
제가 버르장머리 없는 개신교도들을 영적 테러리스트들이라고 해서 열받는 분이 있을지 몰라 책 하나 소개합니다.
Gerald McDermott의 [Can Evangelicals Learn from World Religions] (복음주의자들은 세계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저자의 결론은 있다는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그러는데, 이 책을 또 종교다원주의자의 책이라고 하면서 비판하시는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없겠죠? 이 책은 복음주의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책입니다. 선교는 둘째치고 다른 종교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타종교보면 무조건 마귀나 사탄으로 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주의자 (evangelical)은 복음전도자 (evangelist)와 다릅니다. 전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수 골통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꼴통들이 다른 종교로부터 무엇이가 배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타 종교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What can Korean Evangelicals learn from Korean Buddhism”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한국 불교로부터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
정답이 하나 금방 나왔습니다. 불교도들의 얌전한 대응. 만일 불교도들이 서울의 큰 교회에 들어가 목탁 두드리고 예수쟁이들을 한국에서 몰아 내 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면 무슨 일이 일어 났을까요? 최근에 정부 인권위윈회에서 소수자를 보호하는 인권법 개정한다고 하자 광신도들이 정부 웹에 들어가 광분의 시위를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개신교도들의 가나안 정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죠. 가나안은 축복의 땅이 아니라 살륙의 피가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 땅따먹기 사건을 통해서 저의 글에 분노하시는 분이 있다면,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지만, 가나안 정복의 문제를 다시 성찰하는 기회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프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