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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이지 못한 신학의 부재 |
작성자 brandnew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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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3263 |
작성일 2010-11-03 22:17 |
조회수 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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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문제로 몇 몇 신학의 부재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네요
기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지만 방법론에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는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기독교를 비판당하는 것이 내 살을 깍는 것보다 더 고통이 있지만 그 이면에 무지하고 예의 없다는 말에 사실 대응할 말이 없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이럴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차분히 말씀 속에서 평안을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일듯 싶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단순하게 땅 먹기로 보는 신학의 부재인 사람들, 역사 속에서 그로 인해 십자군 전쟁같은 실패하는 전쟁을 보면서도 이 시대에 똑같이 잘못된 열심으로 가는 분이 적지 않네요 가나안 전쟁을 신약적 의미로 말씀을 조금 드리자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자신 속에 있던 세상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복해가는 것이 신약이 전하고 있는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창세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도 그냥 육적인 가족 관계의 싸움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장 28절 이하를 읽어보면 상징의 의미가 좀 있는데요 내 마음에 두 마음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삭과 같은 언약의 마음이고 하나는 이스마엘과 같은 육적인 세상의 마음인데 결국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육적인 마음을(내 혈육을 끊어내는 힘든 과정) 몰아내고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침묵하는 분들도 많으신 이유는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다만 기독교인으로서 만약 불교도가 교회에 들어와서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읽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고 할까요
침묵이 동의는 아니고 그래도 예의는 지키고 싶은 것의 일종이라고 개인적인 사견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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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04 03:1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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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ndnew님 안녕하세요. \"가나안 전쟁을 단순하게 땅 먹기로 보는 신학의 부재인 사람들\"은 지적은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별로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저한테 질정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구요.
성서의 이해의 부족이 더 큽니다.
첫째는 성서의 선택적 이해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으면서 자기들에게 편리한 구절을 떼어다가 붙이는 일인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성서의 문자적 해석입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나 상황은 완전히 무시하고 문자적으로 현재의 \"나\"의 상황에 맞추는 일인데요. 여러분들이 설교 들을 때, 본문은 신약성서인데, 그 본문보다는 구약 신약 종횡무진 인용하는 설교는 바로 이런 류의 설교들입니다. 땅밟기 이해가 그런 것입니다.
셋째, 이것은 침묵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에 대한 비평적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의 99%가 현대 성서 비평학과는 상관없이 고대 중세적 이해를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비평적 성서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한 이런 일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그 동안 이렇게 성서가 공공연하게 무지한 사람들에게 오용되어 왔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일반 대학에서 [성서개론 101]에 대한 지식만 있더라도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캘거리에서 이런 비평적 성서개론 101에 대한 지식을 갖춘 교회가 몇 분이나 계실까여?
제가 말하는 성서개론은 이런 내용도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다. 구약 39권은 정경으로 이미 예수 시대에 정해진 것같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요한 계시록은 그의 정경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칼빈은 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으며, 루터도 계시록을 거의 무시했다.
사복음서의 저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저자는 거의 모른다. 누가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동일인물인 것으로 알려진 것은 인정되지만, 역사적 인물로서의 누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바울이 쓴 편지글은 13개 또는 12개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7개밖에 없다. 이 7개 중에 후에 가필된 것도 있다. 그래서 아직도 히브리어서가 바울이 썼다고 알고 계시다면 중세에 사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확실히 쓴 것: 데살로니가 전서 (First Letter to Thessalonians), 갈라디아서 (Letter to the Galatians), 빌립보서 (Letter to Philippians), 고린도전서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고린도 후서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빌레몬서 (Philomon), 그리고 로마서 (Letter to Romans) 등입니다.
바울이 쓰진 않았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한 바울을 따랐던 사람이 쓴 것으로 알려진 골로새서 (Letter to the Colossians)와 에베소서 (Letter to Ephesus)가 있으며, 진짜 바울이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이는 데살로니가 후서 (Second Letter to Thessalonians)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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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성경을 보는 차이가 해석학의 차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출발이 어떠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아프리카님의 성서라고 말하는 부분과 제가 성경이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이미 출발이 틀린것이라고 할까요
제가 알기로는 이미 세계에 90% 이상의 기독교가 아프리카님의 성경해석학적 견해에 있고 10% 미만이 제가 부족하지만 가지고 있는 해석학적 견해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모세오경도 모세 생전에 모세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면 몇 몇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것이 정리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사실 복잡한 이야기인것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 깊게 이야기하면 보시는 분들이 아마도 지루하고 쓸데없는 논쟁(제 생각에)이냐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기독교인이라면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단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아프리카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기본적인 개론에 대한 이해없이 땅을 밟음으로서 무엇인가 정복할 수있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늘 아프리카님의 깊은 지식에 부러움도 가지고 삽니다 아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럽고요 진심입니다 한가지 부탁드리자면 좀 살살 다뤄주세요^^
상상할 수 없는 좋은 가을 날씨이네요 마음껏 좋은 날씨 즐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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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0-11-04 07:46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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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new님 밀어 붙여서 죄송합니다. 위의 내용은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성서개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멀리 갈 것은 없고 일반 대학교에서 자연과학이나 다른 여타의 과의 학생들이 교양과목으로 성서에 대해서 개론적으로 듣는 내용들입니다.
\"단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아프리카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기본적인 개론에 대한 이해없이 땅을 밟음으로서 무엇인가 정복할 수있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는데, 현재 한국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brandnew님이 주장하신 것과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동남아는 물론 러시아까지 한인들이 단기 선교로 진출해서 법석떠는 것에 대한 논문도 나옵니다. 출전을 원하시면 알려 드리죠. 그리고 성서에 없는 내용이라 하셨지만, 땅따먹기식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구절은 많이 있죠.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마태복음 28장의 마지막 구절도 오용되는 그런 류에 속합니다. 좋은 날씹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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