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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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웅산 사건>이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순위에 오른 걸 발견했다. 지금이 10 월도 아닌데 난데없이 왜 그 사건이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올랐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즉시 그 이유를 확인해 봤다. 역시 짐작대로 어느 드라마 때문이었다. <시티 헌터> 라는 드라마 lead가 이 사건 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아웅산 묘역 폭파를 기획하고 추진한 주체가 어느 계통이었는지 진상이 확실하게 드러난 건 아니다. 오늘은 이 사건에 대한 진상추적이나 의문점 토론보다도 이 사건에 얽힌 이런 저런 주변 이야기들만 생각나는 대로 해 볼까 한다.
1983 년에는 유난히 대형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우선 그 해 봄에는 중국민항기가 여섯 명의 하이재커들에 의해 공중 납치되어 춘천 비행장에 불시착한 사간이 있었고, 9 월 1 일에는 뉴욕 JFK를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서울 김포로 향하던 KE007 기가 소련 극동군방위사령부의 거듭된 경고와 착륙명령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 핵미사일기지와 전략군사시설 상공 위를 시치미 뚝 떼고 열심히 날아가다 격추 당하는,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안 되는 해괴망측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괴한 사건이 발생한 지 49 일만에 아웅산 묘역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sarnia 는 <아웅산 사건>이 일어난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은 10 월 9 일 한글날이었다. 지금은 한글날이 휴일이 아닌 모양이지만 당시는 공휴일이었는데 그날은 하필 일요일과 겹치는 공휴일이었다. 1983 년 이라면 sarnia가 집구석에 붙어있던 날이 연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공사다망(?) 했던 무렵이었는데, 마침 모처럼 집구석에 붙어 있었던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특별한 날에 특별한 소식을 접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전두환이 죽은 줄 알았다. 나에게 전화를 건 후배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춤을 출 뻔 했다. 사람이 죽은 게 기뻤다는 게 아니라, 드디어 전두환 정권이 끝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또 재작년 밴쿠버 어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국 아이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면서 순간적으로 부럽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1979 년과 1983 년, 나는 마치 1945 년 8 월 15 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방송과 동시에 해방을 맞은 독립운동가만큼 기뻐했었다. 그러니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영유하며 성장과정을 지내고 있는 그 아이들이 부러울 수 밖에……
암튼 그 날, 후배 전화를 받자마자 뉴스를 보기 위해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던 TV를 켰다. 결국 엉뚱한 사람들만 열 일곱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모진 놈 따라갔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다음 날엔가 정작 죽어 마땅한 인간 혼자서 털레털레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그 작자의 질긴 명줄을 저주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웅산 사건 당시 전두환이 정신적인 공황을 겪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 자신이 죽을 뻔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삼고초려 끝에 긁어 모은 인재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대체로 나쁜 놈’임에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탁월한 면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각각 구분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은 지적 열등감이 별로 없다는 것이고, 지적 열등감이 없다는 것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인데 그는 놀랍게도 그런 조건 중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이 무렵 개인교사로 모셨던 세 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비서실장 함병춘, 경제부총리 서석준,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이었다. 전두환의 개인교사 세 명은 이 날 발생한 폭파사건으로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주미대사 출신인 미국통 함병춘은 1982 년 비서실장으로 임명되기 전 연세대에서 강의했는데 이 시기에 이미 신군부와 연이 닿아 있었다. 전두환은 함병춘 등 미국라인의 조언을 참고해 박정희 시대에 축적했던 핵무기 및 전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관련된 모든 자료와 기술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그 기술과 자료들을 모조리 파기해 버렸다. 대한민국의 핵개발 완전포기가 미국이 전두환에게 내건 <대통령 자리 보존 조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김재익은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재직하던 1980 년, 전두환의 집권이 확실시되자 공무원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뜰 결심을 했었다. 살인정권아래서 공무원 생활을 하지 말라는 그의 부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와는 동명이인)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전두환이 연희동 사저로 불렀다.
전두환이 김재익을 설득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으나 거꾸로 전두환이 설득 당했다고 한다. 김재익은 달변이었고 전두환은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전두환은 김재익이 쉽게 풀어 설명하는 개방-경쟁이론에 매료 당하고 말았다. 뭔가 박정희식 재벌위주 성장정책과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김재익의 새 논리는 그를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날 김재익은 주로 국내기업의 자생력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 수입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과 재벌위주로 편성된 금융-세제지원을 없애야 한다는 것, 앞으로 다가올 정보통신혁명에 대비해 IT 투자를 광범위하고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김재익은 학자이자 관료였지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1982 년 봄, 그를 괴롭히던 보안사 출신 권력 실세들을 물리치고 막강한 권력핵심으로 부상했다. 물론 그의 의지는 아니었고 전두환이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웅산 사건 1 년 전인1982 년은 전두환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임과 동시에 권력재편이 일어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그 해 봄 일어난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을 계기로 육사 17 기는 전두환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최종 목표 중 하나가 김재익을 제거하는 것이었을 만큼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당시 청와대 사정수석 허삼수는 김재익의 방을 찾아가 그의 책상에 권총을 집어 던지며 ‘죽고 싶지 않으면 까불지 말라’는 폭언을 퍼 붓기도 했다.
김재익이 전두환의 절대적 신임과 보호를 받으면서 내어놓는 정책들은 하나같이 당시 신군부와 밀착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재벌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는데, 마침 발생한 <장영자 사건>을 김재익 제거의 발판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장영자 사건은 청와대 경제수석이 책임져야 할 사안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막강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책임추궁을 하려 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이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그는 이른바 <삼청동 모임> 멤버들 중 군 지휘관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각개격파로 설득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삼청동 모임>이란 전두환을 견제하고 김재익을 몰아내기 위해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이 이른바 12.12 사건 거사 주도세력을 삼청동에 있는 국가안전기획부 안가로 재소집한 사건을 지칭한다. 이 모임을 주도한 인물은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였으며, 최고선임자는 국가안전기획부장 유학성과 육군참모총장 황영시 등이었고, 이 모임을 전두환에게 고자질한 장본인은 노태우였다.
전두환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하화평과 허삼수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온 청와대 부속실장이 이들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한 마디 했다.
“그만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부속실장은 당직 경호과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동시에 경호과장의 신호를 받은 검정 양복 차림을 한 십 여명의 사내들이 여차하면 권총을 뽑아들 자세로 허화평과 허삼수 두 수석비서관 주변을 에워쌌다.
1980 년대 초반 전두환과 독대하는 시간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장세동 경호실장도 아니었고 유학성이나 그의 뒤를 이은 노신영 안기부장도 아니었다. 바로 김재익이었으며, 전두환은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그를 “경제대통령 각하’ 또는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시간 날 때마다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최근 아웅산 사건이 대한민국의 집중관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니, 그 사건 하면 가장 생각나는 일화들이 떠 올라 그냥 끄적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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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티 헌터라는 드라마가 <아웅산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시간이 나고 기회가 되면 한 번 볼까 한다. 28 년 전 사건을 일약 상위 검색어 순위로 끌어 올린 그 드라마 내용도 궁금하지만, 민주화 이후 성장 세대는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그 날, <모진 놈> 따라 나섰다가 날벼락을 맞고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의 영혼이 안식하기를 기원하며……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이계철 주 버마 대사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강인희 농수산부 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 차관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한경희 대통령 경호실 소속
정태진 대통령 경호실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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