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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어느 날 밤 강화도 야산의 어느 묘지 부근.
20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약간 마른 체구의 사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40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중년사내가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반잠수정 탑승용 잠수복으로 갈아입는 20 대 사내를 도와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약 1 km 정도 이어지는 갯벌을 거의 기다시피 가로질러 주파한 후 해안에 대기하고 있는 반잠수정에 올랐다. 그들이 탑승하자마자 반잠수정은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선수를 서북쪽으로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어느 섬의 절벽을 통과할 때 인근 해병대 제 2 사단 소속 해안경계부대가 비추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잠수정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약 네 시간 후. 이 반잠수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해주시 인근 해변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제 4 군단 소속 해상기지에 도착했다. 해상기지 잠수정 도크 주변에는 무장을 한 경계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반잠수정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선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일단의 사람들이 기지 도크 주변에 도착했다. 모두 세 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상장 계급장을 단 장군이었고 두 사람은 말끔한 신사복 차림을 한 준수한 용모의 중년 사내들이었다.
카키색 군복차림의 장군의 안내를 받아 온 두 신사복은 방금 도착한 ‘반잠수정 손님’을 직접 영접하기 위해 평양특별시로부터 날아 온 고위관리들이었다. 한 사람은 사회안전부 부부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조선로동당 중앙당의 부부장급 인사였다.
조선로동당에서 영접나온 고위관리가 반잠수정에서 내린 20 대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김 선생의 입국을 조국과 인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일단 이 곳에서 아침식사를 먼저 하시고 조국의 수도 (평양) 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제 4 군단 사령부 귀빈식당에 마련된 아침식사를 마친 후, 평양에서 온 두 신사복과 강화도 해안으로부터 반잠수정을 타고 온 20 대는 헬리콥터 편으로 함께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이날 북 코리아 당국이 VIP 대접을 하며 극진히 환대했던 이 20 대 후반의 사내는 약 2 주일 정도 평양과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 머물면서 횟수로는 세 차례 통산 다섯 시간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고, 북코리아 사회과학원 소속 이론가들과 주체사상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로부터 5 년 전인 1986 년
전국 대학 운동권 각급 단위 조직에 충격적인 문건이 시리즈로 전달됐다. ‘어느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드리는 글 ’이라는 이색적인 부제가 붙은 이 팜플렛의 주제와 내용은 그때까지 운동권에서 논의되어 오던 정치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적 주제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는데 주로 활동가의 품성과 조직, 그리고 수령론 등 철학적인 사안에 관한 것이었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당시 전학련-전대협 등 공개조직의 의장단이나 산하 투위의 간부진영에서 활동하다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국회나 청와대에 진출한 이른바 ‘스타군단’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under’ 라고 불리우는 지하조직의 이론가들이 막강한 통제권력을 가지고 전국의 합법-반합법-비합법 조직들을 이끌고 있었다. 조직과 규율, 비밀주의는 당시 운동권 문화를 특징짓는 3 대 핵심요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드리는 글’ 의 저자 역시 당시 학생운동을 이론적으로 지도하던 under 중 한 사람이었는데, 북 코리아의 수령론을 기반으로 품성과 자세를 철학적으로 지도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
특히 ‘미제간첩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주제에서 보여지듯 좌편향 기회주의가 어떻게 이적행위로 결말이 났는가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서 1956 년 북 코리아 내부 이론투쟁에서 승리하고 절대권력을 장악한 김일성 주석 계열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했다.
이 특이한 문건들의 저자가 바로 1991 년 북코리아 당국으로 부터 초대받아 간 ‘김 선생’ 이었다.
남 코리아의 국가안전기획부 (초대 부장 유학성) 와, 그 국가안전기획부가 1998 년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원 (초대 부장 이종찬)은 ‘김 선생 (이하 김 씨)’의 입북 사실을 인지하고 장기간에 걸쳐 수사했으면서도 사건 자체를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이건 아주 놀랍도록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비슷한 시기 극우활동가로 변신한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와 1997 년 북코리아를 탈출해 남코리아로 망명한 황장엽 씨 등이 그의 전향공작을 주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김 씨 역시 어느 시점에 가서 ‘설명이 절대부족한 부자연스런 의문의 전향’을 감행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주체사상의 전도사에서 반북활동가로 변신했다.
도대체 이 전향의 과정과 배후에 어떤 거대한 파워가 작용했을까? 애당초 전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채 일관된 공작만이 진행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주체사상을 도구로 한 자기설득 실패가 오히려 그 실패에 대한 강력한 보상욕구를 불러일으켜 극우노선에 입각한 반북활동하게 되었을 거라는 진단도 있다. 극죄편향이 어느 날 갑자기 극우편향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게 과연 설득력이 있는 소리인가?
그의 반북활동, 아니 이른바 북한민주화운동이 말 그대로 보편적 인권, 인간에 대한 사랑, 그가 그 옛날 강철서신에서 늘상 주제로 삼았던 활동가의 ‘착한 품성’에만 기반을 한 순수한 활동이었다면 그의 주장에 속아넘어가 주는 척이라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3 월 26 일부터 7 월 20 일까지 그에게 일어난 일은 김 씨의 활동이 그런 순수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정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김 씨는 지난 3 월 26 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Ministry of State Security-MSS) 방첩수사단에 의해 같이 있던3 명의 조직원들과 동반체포되어 114 일 간 수사를 받다가 추방되었다. 그가 만일 탈북자 도우미 활동만 했다면 그 과정에서 제 아무리 불법과 탈법을 저질렀다고 하다라도 중국 공안부가 이 사건을 다룰 일이지 중국의 국가안위를 위협하는 간첩활동을 전담해서 수사하는 첩보기관에 의해 그토록 오랫동안 조사받을 일은 아니다.
그와 3 명의 조직원들이 랴오닝 성 다렌에서 체포됐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안전부 방첩수사단은 그들을 단둥지부로 전격 이송했다. 단둥은 북코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접경도시인데, 이는 중국의 국가안전부가 신의주에 있는 북코리아 국가보위부와 이 사건수사를 공조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김 씨와 조직원들을 국가위해죄 위반 혐의로 체포한 것은 이 사건이 남코리아의 민간단체나 국가정보원 차원이 아니라 미국 백악관국가안보회의가 입안 기획하고 미국군 특수전사령부가 추진하고 있는 5029 작전과 연계된 조직적인 간첩활동으로 이 사건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알려진대로 5029 작전이란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들의 정부를 전복하고 친미정권을 수립시키기 위해 그 나라의 반체제 활동가들을 지원해 테러와 무장폭동에 이어 무장반란을 야기하도록 만드는 저강도전쟁전략을 의미한다. 이미 미국은 이 작전, 또는 이와 유사한 작전으로 여러 나라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미국의 작전명 5029은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위험천만한 요소들로 말미암아 노무현 정부 시절 남코리아 당국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취소됐다가 이명박 ‘등신’ 정부가 등장하자 다시 도입된 작전이다. 싸르니아는 약 1 년 반 전인 2011 년 2 월 15 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키 리졸브’ 훈련의 작전개념 변경과 관련해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15/2011021500058.html)
작전명 5029의 핵심은 첫째, 훈련된 탈북자 등을 첩보요원으로 재침투시켜 북한 주민의 반로동당 정서를 확산시키는 한편, 둘째, 유사시 북코리아 영토에 미국 군대가 진주했을때 특수임무대가 북코리아의 핵무기를 비롯한 WMD를 위치를 파악해서 그 기지들을 접수하고 장거리 미사일 및 핵개발과 관련된 과학자 명단을 입수, 그들을 모두 체포하는 것이다.
미국의 전략 목표는 북한 주민의 안전과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북코리아의 반미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탈취하는 것이다. 미국에게는 북한 주민의 인권은 고사하고, 이 위험한 작전으로 북한 지역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전화에 흽싸여 잿더미가 될 가능성 조차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아니다. 그들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반미정권을 전복시키고 그 정부의 주요인사들을 체포 사살하는 것과 장거리 미사일 및 핵무기를 장악하는 것 뿐이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현재 북코리아가 이례적으로 재입북 탈북자 이야기를 공개하고, 국가보위부에서 일망타진했다는 이른바 ‘김일성 동상 파괴 음모’ 사건이 북한의 민심교란을 유발하기 위한 미국 정보기관과 특수전부대의 공작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사건들을 보고 그 저의와 내막을 파악하느라 내심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북코리아의 정보당국이 미국의 개입을 어떤 경로를 통해 어느 수준까지 알고 있느냐일 것이다. 더구나 김정은 체제가 선대의 ‘선군정치’에서 군에 대한 당의 우위적 통제를 강화하면서 정권을 안정화시키려는, 의외의 수정노선을 채택할 기미마자 보이자 이에 대응하는 대책마련에도 골머리를 앓고 잇을 것이다.
김 씨 사건은 이런 와중에서 발생했다.
그가 어제 저녁 선양발 대한항공편으로 입국햇다고 해서 이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안전부 단둥지부에 구금되어 있을 당시 남코리아의 영사접견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첫째 그들의 활동범주가 이미 남코리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 그들이 진짜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은 남코리아의 영사가 아니라 미합중국의 영사였기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도 이들의 활동과 관련해 궁금한 부분이 많을 것이지만, 그 조사내용은 외부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일정 수준에서 강제적으로 차단될 것이다. 1999 년에도 그랬던 것 처럼 김 씨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순전히 내 짐작이지만, 언젠가도 말했듯이 싸르니아의 분석은 거의 매번 틀리는데 짐작은 그와 반비례하여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향이 있다.
각설하고,,,,,,
김 씨가 그토록 품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북한 주민의 인권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작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외국의 위험천만한 군사작전에 하부조직 활동가로 자발적으로 가담했는지, 가담했다면 그 이유와 정당성의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보야야 할 것이다.
김 씨는 지금으로부터 26 년 전 우리 세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했다.
“미제간첩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세월이 지나 우리의 후대 중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하고 또 스스로 대답할 지도 모른다.
“미국간첩 김 씨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건 정말 민족사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