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관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공식적인 신앙은 아래와같다. 신계훈 목사. 유감과 부담을 가지고 그동안 여러곳에서 열린 성경 연구 집회에 나가면서 자주 가지게 되는 유감(遺憾)과 부담(負擔)이 있어 왔다. 집회 초청을 받거나 참석한 사람들을 통하여 듣게 되는 말이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안식일교회는 이단이라는데요.“미국서부의 어느 교회 목사님도 “안식일교회는 이단”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것을 카세트테이프로 제작하여 신자들에게 배포했는데 그중 하나를 들으면서 실색(失色)했다. 대낮처럼 밝은 이 정보 시대에 이토록 왜곡된 비평이 어떻게 진실처럼 유포 되고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풍토가 조성된 배경에는 그동안 한국 교계에 소개된 이 분야의 출판물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쉽사리 알게 되었다. 모처럼 국내의 비교종교학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상을 주고 있는 탁명환씨가 지은 <기독교 이단연구>라는 책이며, 현재 큰 교단의 신학교 교수로 소개된 박영관 씨의 <이단종파 비판>을 읽으며 커다란 실망과 함께 깊은 충격을 받았다.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이해마저 결여한 입장에서 한 교단에 대하여 사형 선고와도 같은 이단 선언을 그토록 가볍게 내릴 수가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책들을 분별력 없이 읽음으로 받게 될 영향을 생각할 때 염려와 두려움이 앞선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비평은 일반 비평과는 다르다. 엄연한 판단의 절대기준인 성경이 있고, 그 위에 시비(是非)를 최종적으로 가려 주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관이나 편견에 치우친 비평은 크나큰 영적 손실을 초래하는 비방(誹謗)이나 형제에 대한 참소(讒訴)가 되고 만다. 더구나 이러한 왜곡된 비평 때문에 영혼이 잘못 인도되었을 경우 그 영적인 결과는 보상조차 불가능한 치명적인 것이다. 그릇된 가르침으로 사람을 오도(誤導)하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지워지는 두려운 책임을 우리 모든 교역자들은 피차 통감해야 하겠다.
(계22:18,19)”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겔22:26-28)”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異像)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그러므로 글이나 말로 백성을 인도할 책임을 진 우리 목사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입장을 무조건 옹호하기에 앞서, 자신의 논증이 양심적으러 성경에 일치하는지에 대해 확신함이 없이는 글과 말로 표현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조했어도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사8:20)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야”(행24:16)할 것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서]필자는 그동안 몇 인사들이 말이나 출판물을 통하여 일방적으로 이단이라고 규정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속한 한 사람의 평범한 교역자이다. 그동안 몇 분들이 쓴 비평 서적을 읽으며,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묵묵부답(默默不答)으로 일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덕성이 아니라는 강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 하며…진리를 알게”(딤후2:15,16>하는 것이 서로의 유익이 된다는 확신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교회란 어느 교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조직이 아니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맡기고 사는 자신의 집의 “기둥과 터”가 견고한 것인지 진리의 안전검사(安全檢査)를 거치는 것이 요긴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말씀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천재지변을 견디지만 인간 전통의 모래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이 일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마7:27)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를 이단으로 비평해 온 인사들과 지면을 통하여 담합(談合)하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 현실에서의 최선의 방법은 그분들이 벌써 여러 차례 출판을 거듭하며 교계에 널리 소개한 책들을 펴놓고 거기에서 직접 인용함으로써 사실에 근거한 지상(紙上) 심포지엄을 갖고자 한다. 그분들은 이미 저서들을 통하여 하고 싶은 비평의 말들을 모두 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에 대해 대답을 할 차례이다. 비평에 대한 변증(辨證)이 또 다른 편파적인 비평이 되지 않도록 객관적인 문헌으로 뒷받침했으므로 직접 참고하기 바란다. 그래서 현실에 오해가 있었으면 이해를 돕고 성경을 곡해(曲解)한 결과이면 이를 밝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딤전2:4)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데에 이 책을 쓰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작은 노력을 크게 축복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리며, 지면을 통하여 대하게 되는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빌1:6,공동번역).
[안식일 준수의 성경적 근거] (安息日遵守의聖經的根據)
[비평,批評 박영관]”안식교는 한 마디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고수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잘못에서 왔고, 더우기 환상적 신비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교의 토요일 예배는 역사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성경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해설,解說] 비평에 의하면, 안식일 교회가 이단인 으뜸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반 신, 구교에서 성일로 준수하는 일요일 대신에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일곱째날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는 것이다. 박영관씨에 의하면,이와같은 안식일 준수는 성경에 근거도 없고,역사적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으로. 안식일 교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함으로 유대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라는 비평이다.
[안식일에 관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공식적 인 신앙은 아래와 같다.](安息日에關한第七日安息日예수再臨敎會의公式的인信仰은아래와같다) “은혜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제칠일에 안식하셨으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창조의 기념으로 안식일을 제정 하셨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네째 계명은 제칠일 안식일을 휴식과 예배와 안식일의 주(主)가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실천에 일치하는 봉사의 날로 준수하도록 요구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 피차의 즐거운 교제를 위한 날이다. 이 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救贖)의 상징이요,성화의 표징이요, 우리의 충성됨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경험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영속적인 표징(sign)이다. 일몰로 시작되는 저녁부터 저녁까지 이 거룩한 시간을 즐거움으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축하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관한 이러한 성서적 신앙이 참으로 정죄받아야 할 이단의 신조인가?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박영관 씨의 비평은 성경에 일치하는 정통 신앙의 신조가 될 만한 것인가?
[변증,辯證]성경을 단 한번 만이라도 차분히 읽고나면 자명(自明)해지는 대답이다. 우선 신, 구약 성경을 기초로 안식일의 기원과 역사 및 의의(意義)를 간단히 밝힌 후에 항목별로 비평에 답하고자 한다.
[창조의 이상—행복의 시간과 공간](創造의理想—幸福의時間과空間)”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히3:4)이시다. 집마다 준공일이 있고 제품마다 제조일이 있듯이 지구도 창조가 마쳐진 날이 있음에 틀림 없다.“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3).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안식일의 역사적 기원이며 성경적인 근거이다.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결혼제도와 더불어 창조와 동시에 분명한 목적과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사람을 바로 결혼 시키셔서, 생명이 태어나는 요람이요,행복을 경험하는 안식의 공간(空間)인 가정이라는 안식처를(安息處)를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 해가 지면서 시작된 제칠일을 안식의 시간(時間)으로 성별하심으로써, 거룩한 시간과 행복의 공간이 서로 만나 이루어지는 숭고한 창조의 처음 안식일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허니문(蜜月)이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역사는 안식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권과 예배의 근거인 창조](主權과禮拜의根據인創造)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자식을 낳았다(出産)는 데 있고, 자녀들로 부터 합당한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한 권리도 역시 그들을 낳았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자격은 창조(創造)에 있고, 인간을 다스리는 주권(主權)의 근거도, 인간에게 합당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마땅한 까닭도 창조에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그러므로 창조하지 아니한 신은 하나님이 아니며, 창조하지 않았으면서도 경배를 받으려는 신은 거짓 신이요, 우상(偶像)인 것이다.(사40:18-25). 그러므로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을 통하여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창조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신 것이다 (출31:13 ;겔20:12). 그것이 네째 계명에 명시된 바, 사람이 안식일을 기념해야 할 이유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제2의 창조인 구속](第2의創造인救贖)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이상(理想)은 깨어지고,주권은 침해를 당하였고 인간은 불행과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드높은 이상을 실현하고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염원이듯,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고, 짓밟힌 주권을 회복하고 빼앗긴 인간의 행복을 되찾아 주시려는 열렬한 소원으로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셨다.(창3:15).이 계획이 구약의 역사에서 실증(實證)된 것이 출애굽 사건이요, 신약에서 성취된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것이 제2의 창조인 구속(救贖)인 것임을 다음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느니라(신5:15).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創造와救贖의紀念日) 이리하여 본래는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이, 출애굽을 통하여 해방을 경험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救贖)의 기념일로서 새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것은 마치 광복절로 기념되는 해방이 없이는, 개천절로 기념되는 개국(開國)도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즉 본래 지구 창조의 기념일(開天節) 이었던 안식일이 동시에 구속의 기념일[光復節] 로서의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조 당시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2:1)는 창조선언이 있었듯이, “안식일이 거의 되었”(눅23:54)던 같은 시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인류를 죄에서 해방 시키신 후, “다 이루었다”(요19:30)는 구속(救贖)의 선언을 통하여 확인하고 있다. 또한 구약의 역사적인 구속(救贖)인 출애굽은 성력 1월14일인 유월절, 곧 무교절 안식일이 시작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을 죽여 피를 바름으로 이루어졌다(출12:1-12). 그 후 신약에서 같은 유월절이며, 동시에 제칠일 안식일이 시작되는 같은 시간에 유월절 양으로 돌아가심으로써 (요19:31). 안식일이 창조와 구속(救贖)을 함께 성취시킨 역사적인 기념일을 확증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주일에,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눅23:56)는 기록은 십자가 때문에 안식일이 결코 단절(斷絶)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려는 복음서의 의도인 것이다.
[순종의 시금석](順從의試金石) 출애굽의 목적은 구속(救贖) 곧 죄로 부터 해방에 있었으며, 해방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본분인 예배에 있었다(출3:22,23, 5:1,3, 8:27, 10:8,9,25,26). 이 목적은 출애굽과 동시에 실현되었다. 그리스도를 상징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속량(贖良)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즉시 사람의 본분인 예배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전에,하나님께서는 기적의 양식인 만나를 내리실 때 제6일에는 두배를 거두게 하시고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으심으로써, 안식일에는 애굽에서처럼 먹고 사는데 얽매인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가르치셨다. (출16:2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도 육신의 양식인 만나를 거두러 나간 백성들을 견책하시며,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6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것”(출16:28,29)임을 밝히셨다. 이와같이 십계명이 있기 전부터, 안식일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심을 시험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었다. 그리고 십계명이 주어진 후에도, 안식일 준수의 의미는 더욱 강화 되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의 대대의 표징(表徵)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출31:13)고 재확인 하셨다. 하나를 보면 열가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안식일 준수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구약시대의 안식일](舊約時代의安息日) 이러한 안식일 제도의 중요성은 그 후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단히 강조 되었다(사56:6,7, 58:1,3,14, 66:23 : 렘17:19-27).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은 했어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지고, 또한 후에 바벨론으로 다시 포로되어 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식일을 무시하고 고의로 더럽힘 때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계20:10-13,16-24 : 렘17:27:느9:13-17).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구속주가 되셨으며, 십계명의 입법자로서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인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예수그리스도와安息日) 약속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태어나심으로 시작된 신약시대에는 안식일 제도에 어떠한 변화나 새로운 의의(意義)를 가져 왔는가? 예수께서는 친히, “인자(人子)는 안식일의 주인”(막2:28:마12:8)곧, “안식일의 주(主)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구약시대 거듭거듭 “여호와의 안식일”, “나의안식일”(출20:10 ;신5:14 ;사58:13)이라고 선언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안식일의 주(Lord)”라는 말씀으로, 안식일에 관한 당신의 권위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을 주목하여 보자. 유대인들이 이를 이용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同等)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다고 고발된 것은, 안식일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까지도 정죄한 바리새인 들의 전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약 학자인 전경연 씨도 이 사실을 아래와 같이 확인하고 있다. “예수는 안식일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 안식일을 까다롭게 만든 율법 학자들의 궤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최고 주권자로서 안식일의 본래 목적대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시고,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재창조의 능력을 주로 안식일에 드러 내셨다(마12:11-13 ; 눅13:10-17, 14:1-6). 이와같이 예수께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주권(主權)을 주장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창조주로서의 신분을 밝히신 것 이상으로, 안식일의 중요성을 어떻게 더 강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오해하며, 마치 예수께서 안식일을 무시하여 고의로 범하신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그 당시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곡해(曲解)를 또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일요일을 주일로 옹호하고 있는 현대 신학자인 주이트(Paul KJewett)도,”예수님은 안식일 제도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단지 안식일을 지키는데 대한 장로들의 유전을 거부한 것 뿐이었다. “예수님은 결코 안식일을 폐지하지 아니하셨다”고 시인하고 있다.
[증언 주이트](證言jewett)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그러했던 것 같이 예수는 구약을 성서로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구약 성서는 안식일을 최고의 윤리 법전인 십계명에다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전통에 짓밟혀 본래의 의의를 상실한 안식일을 회복하시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불사(不辭)하셨다.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 누가 생명을 거는 어리석은 일을 하겠는가? 또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눅4:16)시는 등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안식일을 준수하셨음을 뚜렷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안식일의 존속(存續)을 결코 단절(斷切)시키지 않았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방인을 위해 쓰인 복음서인 누가복음에는 무덤에 장사되셨던 그 안식일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눅23:56)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예언과 안식일](그리스도의豫言과安息日)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안식일 제도가 약화되는 대신 더욱 강화되었음은 그것이 창조의 기념에서 구속(救贖)의 기념으로 증폭(增幅)되었음과 더불어 확고해졌음이 다음의 사실로도 확인된다. 서기31년 십자가에 달리시던 마지막 주간에 감란산에서 행하신 고별설교에서, 당신을 거절한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보시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피할 길을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마24:20,21)고 예고 하셨다. 예고된 예루살렘의 멸망은 불가피할지라도(단9:26), 그리스도인들이 찬 비가 내리는 음산한 팔레스틴의 겨울에 불어난 요단강을 건너 피난하는 어려움과 함께, 거룩한 안식일에 피난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기도드리라는 간곡한 말씀이다. 과연 예언 그대로 서기70년 9월 로마군에 의한 오랜 포위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100여 만명이 기근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대파멸을 겪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경고하신 말씀을 따라 사전에 요단강을 건너 Pella 지방 으로 피난하여 멸망에서 벗어났다. 십자가 이후 거의 40년 만인 서기70년에 있은 예루사렘의 대파멸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할 안식일임이 주님의 의하여 확인되었다면 그 이상의 논증이 필요 없지 않은가?
[사도시대의 안식일](使徒時代의安息日) 서기49년 경에 열렸던 그리스도교 제1차 세계총회 격인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사도들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드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야기된 교리적인 문제들이 다뤄 졌다. 그 때에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의식적인 율법인 할례문제는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행15:7) 폐지하기로 결의하였다.(행15:19-21).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안식일 준수 여부는 거론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여부가 거론되지 아니한 이유와 같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旣定)사실은 아예 취급하려 하지도 않은 것이다.(행15:5-11). 이와같이 사도시대 동안도 제칠일 안식일 이 변함 없이 준수되었음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행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주님의 본을 따라 이방 땅에서도,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행17:2)하였고, 또 “안식일 마다” 그렇게 하여 (행18:1-4,11,13:14, 42-44, 16:12,13), 사도행전에만 84회의 안식일 준수가 함축되어 있다. 만약 안식일이 이방인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의식적인 율법이었다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칠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어진 사실을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그러나.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행20:27)고 고백한 바울은, 의식적인 율법인 할례는 한사코 반대 했으면서도 안식일은 자신이 먼저 준수하여 솔선수범했다(행21:20-24).
[마지막 때와 안식일](마지막때와安息日) 이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요, 탄원인 요한계시록의 세 천사의 기별에는 안식일과 직접 관련된 중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14:6,7).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창조주로서 합당한 경배를 받으신다(사43:7).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일은 사람의 본분이요, 이에 대하여 각 사람은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안식일의 목적이 바로,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출20:11)셨음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께명에 따라 이러한 본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시대의 성도,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로 특징지워져있다. 이와같이 마지막 때의 심판과 안식일이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사56:1,2)>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새 하늘과 새땅에서의 안식일](新天新地에서의安息日) 이사야 선지자는 계시록에도 나타난 회복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면서,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66:23)고 기록했다. 또한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는 사람들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뿐만 아니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사58:13,14)는 영원한 축복을, “여호와의 입의말”(사58:14)임을 단서로 약속 하셨다. 이리하여 죄로 잃어버린 실낙원(失樂園)에서 구속으로 다시 회복될 복락원(福樂園)까지 이어지는 안식일의 역사적 일관성(一貫性)은 아래와 같이 성경 전체에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다.
실락원 에덴<창2:1-3>--출애굽 십계명 이전<출16:22-30,창26:5>--시내산 십계명 이후<출20:8-11, 31:13 : 레23:3>--이스라엘 남북왕조시대<사58:13,14 왕하4:23 :렘17:24 :암8:5>--바벨론 포로시대<겔20:12,20,22:26>--포로귀한 이후<느10:31,13:15:22>--신구약 중간시대(역사적 기록)마카비 상2:31-38 마카비 하6:6>예수님 당시 <마12:5-8,막2:27,28 막3:4 눅4:16>--죽으심과 부활전후<눅23:56 마28:1 막16:1>--사도시대<행13:42-44,16:13,17:2,18:4>--마지막 심판과 환난의 때< 사56:1,2 마24:20 계14:7>복락원 신천신지<사66:23>
이제까지 복습을 겸하여, 신.구약 성경을 기초로 안식일의 역사적인 기원과 성경적인 기원과 성경적인 근거를 간단히 살펴 보았다. 이토록 분명한 성경의 증거를 확인 하면서, 제칠일 안식일 곧 오늘날의 “토요일을 안식일로 고수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잘못에서 왔고…안식교의 토요일 예배는 역사적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성경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라고 비평한 박영관씨의 비평이야말로 참으로 역사적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 근거도 없는 허구(虛構)한 논증임을 안타까움을 느끼며 지적할 수 밖에 없다. 辛啓勳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