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에드몬톤)과 22일(캘거리)에서 열린 CN드림 주최 최성철 목사 초청 공개강좌가 있었으며
여기서 발표된 내용을 총 8회로 엮어 CN드림 신문에 연재가 시작되었으며, 본 내용을 매주 이곳 종교게시판에 올립니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1)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누구인가?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의 서간집에 이런 기도문이 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안(serenity)을 주시고,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용기를 주시되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삶의 여정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에 대해서 진솔하게 고민하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CE 325년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치적인 야욕으로 니케아 신조를 만든 이후 적어도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교회는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깨달음의 참 인간됨’을 교리와 형식으로 무시하거나 변질시켰다. 예수는 성직자도 교리주의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으며, 오직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 평범한 인도주의자(humanist)였다.
오늘 세계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물론 인류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예수의 참 인간성에 감동된 인도주의자들이다. 기독교교회는 성서 근본주의에서 해방되어 잃어버린 ‘역사적 예수의 참 인간성’을 회복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참 인간됨을 따라 스스로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성서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은, (1)호모싸피엔스 인간의 정체성, (2)참 인간이 되는 길의 걸림돌, (3)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기원, (4)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 (5)성서시대의 배경, (6)구약성서의 발전사, (7)신약성서의 발전사, (8)성서의 정경화 과정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종교인이 되기 전에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신앙과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의 한계 넘어에 있는 영원함과 신비함과 거룩함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생물종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을 알 수 있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기에 호모싸피엔스라고 부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아의식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경험하면서 허약감, 종속감,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고 본향으로 되돌아가 안전한 안식처를 되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자아의식은 주전 960년경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기 2장)에서 잘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성서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대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간의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것도 아니고 죄(타락)-회개-용서-구원의 구속론 교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원죄론은 구약의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지 1500년 후에, 주후 5세기에 성어거스틴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교회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창작한 교리이다. 아담과 이브가 새로운 인간으로써 자아의식을 깨닫고 새로운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은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성스러운 생명이며 자신도 어떤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원복(Original blessing)을 확신한다. 아담과 이브는 한 때 하나님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았던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아의식을 통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은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려고 영생에 대해 꿈꾸기 시작했으며 종교적 내지는 영적인 사고가 발달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특이한 생물종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Religion)와 영성(Spirituality)은 항상 인간과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생물종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화 과정에서 두려움의 부산물인 편견과 이기심과 욕심과 배타심을 자의반타의반 갖게되었고 이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만든 종교들은 이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을 정직하게 밝히지 못할 뿐만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의 해방과 영생에 대해서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분법적 교리들을 창작하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오히려 더 많은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원죄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체제가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악용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영생을 팔아먹는 것에 저항했으며, 그 대안으로 ‘참 인간이 되는 구원의 길’ 즉 ‘참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이 온갖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불교의 붓다도 인간이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서는 길을 기존 종교체제에서 찾기 보다는 명상을 통해서 깨달았다. 붓다도 예수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부산물이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편견과 이기심과 욕심과 배타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와 붓다는 내려놓고 비우는 길만이 참 인간으로 자유하게 살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몸소 살았다. 그러나 후대에 추종자들은 기독교와 불교라는 종교체제를 만들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보상심리의 이분법적 교리와 전통과 형식을 만들었다.
예수의 정신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천당)으로 가서 영원히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천당과 지옥, 축복과 징벌의 이분법적 교리와 공식은 사람들을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보다는 더 많은 두려움과 이기심과 편견과 배타심을 조장하고 더 큰 고통을 줄 뿐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예수가 산 것처럼 인간의 본능인 생존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에서 영원함 즉 영생을 누리며 사는 참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예수는 영생을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영생은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라고 선언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깊이 깨달은 ‘진짜 바울’도 영생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참 인간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얼나(靈我)이며, 순간에서 영원함 (영생)을 누리며 사는 참나이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은 두려움과 편견과 욕심으로 가득한 몸나를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참 인간이다.
따라서 현대기독교인은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 예수, 인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새로운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성서 근본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성서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하면 순간에서 영생을 누리는 참 인간의 길 –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예수, 새로운 인간 - 을 찾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인들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은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예수, 바울, 석가, 노자, 장자, 톨스토이, 테레사 수녀, 달라이 라마, 마이스트 에카르트, 간디, 유영모, 슈바이처, 마틴 루터 킹은 죽음의 두려움과 그 부산물로 생겨난 편견과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참 인간으로 살았다. 또한 이들에게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관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었다. 현인들은 모든 인간은 사는 의미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깨달으면서 참 인간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죽음 앞에서 경건한 체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나 정직하지 못한 믿음 속에 죽음의 두려움을 감추는 것은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서의 하나님의 이야기도 아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순수하고 진실한 인간성 즉 참 인간 됨의 확장이다. 역사적 예수의 솔직한 인간성에서 신성이 드러났다.
기독교인은 인간성을 무시한체 신성을 느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현대기독교인들은 참 인간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타난 ‘예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미’와 ‘인간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였다. 역사적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이 아니라, 참 인간의 모범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간성에서 종교체제의 간섭과 중개없이 스스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서 근본주의는 참 인간 예수를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며,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나님의 정의는 ‘참 인간 예수의 의미’를 방해하고, 참 인간의 존성성을 파괴한다. 거룩한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참 인간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이었으며, 이 예수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을 가능케했고,
죽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무시간적인 세계 즉 영원함으로의 시작인 생명의 차원임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되 충만하게 주려고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살았다. 여기에 예수에 대한 교리를 믿고 안믿고의 조건이 없다. 예수는 중개인이 아니다. 다만 예수가 산 것처럼 사심없이 사는 것이 참 인간이 되는 길이고 구원의 길이고 영생의 길이다.
기독교는 외부의 신이 지구로 내려와 만든 종교가 아니라, 참 인간 예수가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있고,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의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이 드러난다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시작된 삶의 종교이다. 예수의 깨달음에 따르면 기독교는 ‘믿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에 함께 있는 하나님을 느끼고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사는 종교’이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시대의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요청한 것처럼 성서 근본주의의 ‘종교적인 인간’에서 깨달음의 ‘참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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