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의 신학은 바울의 신학에 기초합니다. 이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바울이 있다는 사실에 주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진짜 바울이고 나머지 셋은 가짜 또는 반동의 바울입니다. 13개의 바울 서신은 바울이 쓴 편지들과 바울이 쓰지 않은 편지들과 저자가 불확실한 편지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짜 바울이 쓴 서신들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입니다. (참고: '첫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그 보그 $ 도미닉 크로산 공저)
오렌 세월 동안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서를 인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했으며, 자신들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3:1-7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정치적인 권위에 침묵을 지키도록 강요했으며,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로 착각하고 불의한 정치에 침묵을 지켰습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참 믿음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에 침묵을 지켰던 독일 기독교 교회와 군사정권 시대에 침묵을 지켰던 한국 기독교 교회와 911 테러사건 이후에 이락침공에 대한 미국 기독교 교회의 침묵은 진짜 바울의 복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심층적으로 깨달은 진짜 바울은 로마황제의 통치에 항거하는 운동으로 황제의 모든 호칭들 즉 하느님의 아들, 평화의 왕자, 구세주, 등을 예수의 호칭으로 전환했습니다. 바울에게 자신의 황제는 제국주의의 로마황제가 아니라 예수라고 선언했습니다. 후대에 기록된 복음서들도 바울의 정신에 따라 로마황제 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칭들을 예수에게 적용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호칭들은 극히 정치적이고 불공정한 분배의 정의에 항거하는 외침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평화의 왕자라고 부르면서 불의하고 양심을 상실한 정치에 침묵을 지키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예수의 호칭들은 교리가 아닙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충실한 신자가 아닙니다.
기독교 교회는 박근혜 정부의 불의한 정치에 대해서 정의의 소리를 크게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