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을 봤다. 영화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고영주 변호사를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12월 18일 개봉한 이 영화는 누적 관객 900만 명을 돌파했다. 필자는 변호인이 개봉되던 날 우연히 극장에 간 적이 있다. 다른 성인 영화는 모두 밤늦은 시간이나 자정이 넘은 시간대에 배치해 놓았다. <변호인> 외에 다른 영화를 사실상 선택할 수가 없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에도 주말마다 극장에 가 보았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변호인’의 흥행 요인이 극장의 압도적인 시간 배정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영화는 첫머리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라고 자막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영화 감상평을 보면 대부분이 영화의 내용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실화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련 영화 평론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의(好意) 일색이다.
하지만 필자가 변호인을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이 영화가 다분히 선동적이고, 정치적이며,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른바 ‘부림(釜林)사건’(부산의 학림사건. 영화에서는 ‘부동림’이라고 명칭을 바꿈)을 내세워 한 평범한 세무 변호사(송우석-송강호 분)가 ‘열혈 정의의 사도’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국가와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경찰과 검찰은 한마디로 ‘절대악(惡)’으로 그려진다. 경찰과 검찰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피의자들을 고문하고 인권을 짓밟는다. 영화에서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일제시대의 악질형사, 히틀러의 비밀경찰, 소련의 스탈린, 중동의 도살자인 이라크의 후세인보다도 더 사악하게 그려놓았다.
‘절대악’으로 그려진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
필자는 논리 전개가 치밀한 법정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주인공인 변호사나 검사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는 것이 법정영화의 핵심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영화 속의 변호사나 검사와 같이 울고 웃으면서 정의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불의(不義)가 승리하면 공분(公憤)하게 된다.
변호인을 보기 전 ‘그래도 명색이 흥행 1위 영화이고, 법정영화인데 다른 영화를 압도하는 논리전개가 있겠지’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글자그대로 ‘어이가 없다’는 느낌만 받았다.
<변호인> 필자가 생각했던 증거와 논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런 법정 영화가 아니었다. 단순히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혹은 국가)을 국가를 무자비한 폭력집단으로 설정한 후 이에 맞서는 노무현 혹은 친노(親盧) 세력을 정의의 사도로 포장하기 위한 목적이나 내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에서 절대선(善)으로 포장한 ‘정의의 사도’ 세력은 스스로 ‘폐족’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결코 아름다운 흔적만을 남겨 놓은 것이 아니다.
이념과 지역,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부자와 서민, 서울대와 기타대학, 배운 사람과 못배운 사람으로 나라를 사분오열(四分五裂) 했다는 민심의 심판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도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1981년에 발생한 부림사건은 ‘공산국가 건설을 위한 의식화 교육’ 등의 혐의로 관련자들이 유죄를 받은 사건이다. 2009년 재심 판결에서도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사건의 핵심인 국가보안법 위반은 여전히 유죄인 상태다. 영화는 부림사건을 ‘부동림사건’이라고 살짝 명칭을 바꾼 후 경찰과 검사가 불법체포와 고문을 통해 일방적으로 조작한 사건으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피의자들에게 어마어마한 고문과 폭력이 동원된다.
하지만, 폭력이 잔인한 만큼 거기에 비례해서 국가가 부림사건을 조작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사건의 실체 자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사건을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공권력의 폭력이 동원된다. 이런 설정을 관객에게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할까?
영화에서 부림사건은 경찰 상사가 부하에게 “사건을 하나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감을 얻지 못하는 고문장면
이에따라 야학 교사인 대학생 ‘진우’군이 수업 중 경찰에 다짜고짜 체포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우는 그저 순수한 열정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야학 교사일 뿐이다. 하지만 경찰은 그를 불법 연행해 무려 한 달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온갖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다. 고문에 못이긴 진우군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자술서를 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고 했던가. 영화에서 당국은 이 사건이 ‘부산지역의 최대 반정부조직’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시종일관 벌벌 떨며 자기가 왜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순진한 학생을 경찰과 검찰이 달려들어 한 달이나 고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관객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진우라는 학생은 부림사건의 다른 맴버들과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 독서토론회 모임의 회원 같은데, 단지 그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매타작을 당한 후 부산지역 최대 반정부조직의 회원으로서 국가전복 활동을 했다는 자술서를 쓰게 한다.
이 부분에서 송강호가 주연했던 <효자동 이발사>의 한 장면이 겹친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안기부가 대통령 이발사의 어린 아들을 남산의 지하실로 끌고 가서 “접선한 간첩을 대라”며 고문받고 불구가 되는 장면이 있다. 소위 ‘독재정권’의 비도덕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어린 아이를 고문해서 불구로 만든다는 설정을 과연 어느 누가 사실로 받아들이며 공감을 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변호인>은 소위 ‘군사독재’ 시절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나, 민주화에 대한 시대의 열망을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려내지도 못하고 있다.
실체가 없는 사건을 조작으로 만들어 냈다고?
부림사건은 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사건이다. 재심에서도 유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영화는 그들이 왜 무죄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법리논쟁으로 관객을 설득하려고 시도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영화에서 의도한 대로 부림사건은 경찰과 검찰이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아무 죄도 없는 독서토론 모임 회원을 고문해서 빨갱이로 둔갑시켰다는 주장이 설득되기 때문이다.
실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고영주 변호사는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검사인 자신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설교’까지 했으며,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한테 조사를 받고 있지만, 나중에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검사님이 우리한테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 변호사는 ‘피의자들이 전혀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니고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에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상반된 주장이 있고, 더구나 당시 재판을 맡은 법원은 부림사건의 피의자들이 제기한 가혹행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영화에서는 법원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경찰과 검찰이 이들을 고문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찰이나 검찰이 왜 이 순진무구한 학생들을 그렇게 집요하게 ‘빨갱이’로 만들려고 했는지, 또 피의자들이 진짜 주장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지를 법정영화답게 피의자들의 입이나, 변호인의 입을 통해 알렸어야 한다. 영하는 피의자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전혀 알리지 않음으로써 부림사건이 마치 실체가 없는 사건인 것처럼 교묘하게 가리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부림사건은 엄연히 실체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들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공산주의 의식화 학습을 하였다고 명확히 판결하였다. 부림사건이 실체가 없는 사건이면 오늘날 일부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반독재 투쟁’이니 ‘민주화 운동’이라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데 누구를 대상으로 투쟁하며, 민주화 운동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조롱
이처럼,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지 못한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열혈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한 주인공 송 변호사가 법정에서 고함을 지르며 “이 학생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판단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이냐”고 항변하는 모습은 보기 애처롭기까지 하다.
송 변호사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고문에 의한 자술서밖에 없지 않으냐”고 하자 증인으로 나온 경찰이 “사상범이 물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송 변호사가 다시 “학생과 시민이 책을 읽는 것이 국보법 위반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경찰은 “그것은 내가 아니라 국가가 판단한다”고 주장하며 “입 닥쳐 이 빨갱이야!”라며 소리친다. 검찰과 한통속인 판사는 변호사를 보고 “한 번만 더 경거망동하면 퇴장이야” 라고 힐난한다.
이런 몰상식적이고 엉터리 같은 대화가 어떻게 법치국가의 법정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시나리오 작가가 법정재판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대사를 썼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는 경찰과 검찰은 물론, 판사까지 죄다 한통 속으로 나오는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조롱하자는 의도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설정이다. 1970~80년대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법조계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법부 모독의 막가파식 설정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사실과 논리, 객관성을 배제하면 ‘왜곡’과 ‘몰상식’, ‘선동’ 만 남을 뿐이다. 히틀러의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영화를 통해 독일 국민이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우게 하였고, 상당한 효과를 거둔 사실이 있다.
문화계를 장악한 좌파적 문화코드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의 흥행 영화를 관통하는 흐름 중의 하나는 좌파적 문화코드다. 흥행영화 감독들이 민노당에 가입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 적도 있다. 여기에 CJ같은 대기업 배급사가 뒷받침하면서 좌파적 문화코드는 영화 산업의 주류문화로 자리잡아 왔다.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 좌파 코드 영화로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웰컴투동막골>란 영화를 들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ㆍ25사변 중 국군과 북한 인민군의 과실을 양비론처럼 다루면서 국군이 재판도 없이 양민을 학살한 것을 일반적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또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부모 세대의 희생을 “이념이 뭔데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느냐”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실미도>는 국가가 살인자 무리로 군대를 만들어 활용하다가 필요 없을 때는 쓰레기 버리듯이 버리는 조폭 집단 보다 못한 것처럼 표현했다.
<웰컴투동막골> 전쟁 때 우리를 도와 5만명의 전사자를 낸 혈맹 미군을 마치 유토피아를 파괴한 침략군인 듯이 그리는 등 좌파적 역사관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가치관이 덜 발달한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정의감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경찰과 검찰은 국가권력으로 상징되며, 이들은 애국심을 내세우며 인권을 짓밟는 악마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고문 경찰은 상대를 폭행하는 와중에서도 애국가가 나오자 부동자세로 경례를 취하는 데, 굳이 이런 장면을 삽입한 의도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관객으로 하여금 당신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애국가와 국가상징, 애국심이란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것을 교묘하게 역설하면서 국가의 권위를 희화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은 좌파적인 문화코드에 더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시대의 양심’으로 그리며 친노 세력들에게 반독재-인권투사라는 ‘그럴듯한’ 감투까지 씌워주고 있다.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친노 세력들은 이 영화를 일제히 찬양하며 정치적 발판으로 삼기 위한 세결집을 시작했다.
사족(蛇足):
소위 인권변호사이자 서민이라고 내세우던 노무현 대통령은 요트를 소유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변호사가 요트를 구입한 이유에 대해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연습용 요트를 하나 구입했다”는 식으로 표현됐다. 그야말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외에는 낯이 간지러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사다. 기사출처:
조선Pub http://pu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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