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토요일 Costco에 갔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사람들이 많았고 점심시간이 서너 시간 지난뒤라서 시장기가 도는 때였습니다. 이 때 쯤 가면 시식 코너도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이런 코너에 모여들어 여러 음식들을 맛보곤 합니다. 인기있는 곳엔 심지어 줄을 서야 하는 불상사도 생기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체면을 많이 차려서 줄을 서면서까지 시식을 기다리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이날 레이크 루이즈를 연상시키는 색깔의 음료를 시식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막 지나치려는 찰라, 저는 큰 소동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서로 언짢은 말이 오가는 것을 얼핏 엿들었습니다.
거기엔 60대 중반 이상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줄을 서서 조그마한 플라스틱컵에 담긴 이 음료를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갑자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나타나서 두잔의 음료를 휙 들고 갔습니다. 그래서 남성 노인이 약간 화가 났는지 이렇게 살짝 외쳤습니다.
"I am waiting in line" / 나 지금 줄서고 있는 중이오.
그랬더니만, 음료수 한잔을 어린 딸에게 건네 준뒤 이 젊은 남성이 돌아서서 이 말을 살짝 되받아쳤습니다.
"You're sixty,[but] she's six!" / 당신은 60살이지만, 쟤는 6살이오.
이 촌철살인같은 한마디가 지나가던 저한테도 휙 날아오는듯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제법 감정의 톤을 넣어서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You're not six, though.!" 하지만 당신은 6살이 아니잖소.
이 대화로 끝이 났지만, 이 젊은 남성은 아내, 그리고 어린 두 자녀에 둘러 싸여 있었는데, 얼굴엔 감정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짧은 대화를 목격하고 들으면서 노인의 입장에 있었어도 화가 났었을 것같고, 이 젊은 남성의 입장에서도 좀 속상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노인은 10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제가 볼 때 딱 10초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또 이 젊은 남성 역시 그냥 줄인줄 몰랐다 미안하다고 한마디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 각자의 입장이었다면 저 역시 그들과 똑같은 reaction을 보였을 것이라고 확신하니까 제 3자는 언제나 현자가 됩니다.
즉 나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자비롭고 너그럽고 또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만 그것이 나의 "실제" 상황이면 거의 crazy로 빠집니다. 우리의 페르소나는 늘 이런 가면을 쓰고 있겠죠.
얼마전에 저는 empathy의 한국어 번역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여기에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을 올리고 난 후 영어로 empathy vs. sympathy 카워드를 치니 이들의 의미상 차이를 설명하는 글이 상당히 많더군요. 대부분의 글들은 empathy가 더 포괄적이고 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전형적인 설명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Empathy is heartbreaking — you experience other people's pain and joy. Sympathy is easier because you just have to feel sorry for someone. Send a sympathy card if someone's cat died; feel empathy if your cat died, too.
http://www.vocabulary.com/articles/chooseyourwords/empathy-sympathy/
empathy는 타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타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면, sympathy는 타자가 당한 고통 등에 안타까운 유감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의 차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Death of a Father oooooooo
A man is talking about his father's death, which had occurred a week earlier. As he talks about missing his father and his powerful love for him, the man's voice gradually becomes filled with anguish and then he bursts into tears in front of a friend who is listening to him.
If the friend uses sympathy, she might think, for example: He is remembering his father with pain. Poor Roger. If the friend decides to verbalize her thoughts, she might say to the grieving man words such as: "I feel your pain."
If the friend uses empathy, she might think, for example: He is remembering his father with pain and also the pleasure of his love for him. If the friend decides to verbalize her thoughts, she might say to the grieving man words such as: "I feel your pain and also your great love for your father."
This sharing of the painful feelings of another person is characteristic of both sympathy and empathy. However, the person using sympathy would pay more attention to the pain than to the love for the father whereas the person using empathy would pay equal attention to the pain and love.
If the friend added "I'm sorry for your loss," this statement would also be characteristic of sympathy, but not of empathy. The person using empathy would share the grieving man's emotional pain, but not necessarily feel sorry for or pity him. Of course, one can use both sympathy and empathy, for example: "I feel your pain and also your great love for your father. I'm sorry for your loss."
Before proceeding to the next anecdote, a comment on terminology. Other terms for "sharing of feelings" are "feeling into someone"1 and "experiencing with someone."
http://www.empathy-and-listening-skills.info/
한 남자가 자기 부친의 사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친구가 sympathy를 가지고 있을 경우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자기 부친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는구나. 그래서 참 안됐다. 그런데 이 친구가 empathy를 갖고 있다면, 그가 부친의 사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데, 그것은 그가 얼마나 부친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알겠다. 전자가 단순히 동정의 마음을 보냈다면, 후자는 부친의 사망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가 부친과의 관계가 참으로 돈독했었다는 부자간의 스토리라인을 죽 따라가려는 매우 적극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면에서 본다면 empathy는 너의 마음을 나도 공감하려고 한다는 정도를 넘어 너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마음의 느낌의 전부를 이해하고 느끼려는 마음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감정이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설명은 개인의 심리간의 교류에 그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분야는 모르고 현상학에서 말하는 타자를 향한 태도의 문제를 몇마디 덧붙일까 합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에포케"(epoche), 즉 '판단중지'(suspension of any judgement)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기존 신념을 미루고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를 이해하자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타자를 만날 때 나의 선입견이나 나의 신념을 아예 괄호로 쳐서(bracketing) 중지시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류학에서 타문화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인류학자가 아프리카나 남미의 부족사회를 연구하러 갔을 때, 한국의 근대화된 문화나 신념체계를 갖고 하면 제대로 현지문화를 이해할 수 없겠죠. 저는 세계테마기행을 즐겨보지만, 가끔가다가 좀 불편한 표현들을 듣곤합니다. 이 기행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나 작가들은 현지문화를 쉽게 판단하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말들을 보면, 문명/비문명, 부/가난, 한국의 70년대/현재의 한국 등이 끊임없이 대비됩니다. 은연중에 드러내는 자문화우월주의 또는 자민족중심주의가 들어있다는 것이죠. 나의 입장을 괄호로 묶고 내 입장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이러한 판단중지하에 타자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타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empathy는 더 어렵습니다. 최소한 empathy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타자속에 나의 명석한 두뇌와 예리만 느낌으로 들어간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가령, 인류학자가 현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현지의 언어, 문화, 습속 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자칫하면 이 사람은 현지 문화인이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북미 원주민들의 Shamanism을 이해하려고 스스로 shaman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샤만을 알려고 스스로 샤만이 되는 initiation의 절차를 다 겪는다는 것이죠. 그랬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empathy가 일어나는 것이죠. 마이클 하너의 방법이 옳고 그런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먼 인류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결혼을 해서 수십년간 함께 살아도 아내의 마음을 또는 남편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어나는 황혼이혼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은퇴를 하고도 인생의 끝자락인 황혼에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참 이해가 안갑니다. 그것도 겉으로는 잘 지낸 부부가 말이죠. 아내의 reserved한 미소속에 담긴 의미를 남편은 아예 몰랐던 것이죠.
"공감"이라는 말을 넘어서.
그러고 보면, empathy를 공감이라는 말로 번역하면, 이 말의 적극적인 의미를 잃는 면도 있습니다. 물론 감정이입이 좋은 번역어는 될 수는 없지만, empathy는 이러한 공감의 문자적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크 위르겐스마이어는 종교사회학자로서 이른바 테러를 감행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해서 참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Terror in the Mind of God]이 그 책입니다. 그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뿐 아니라 낙태시술을 하는 의사에게 테러를 감행한 pro life 기독교 근본주의자도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에게 sympathy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empathy의 마음을 갖고 이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결코를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해하는 empathy는 단순히 감정을 이입하거나 공감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마음과 상황 전체를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자 낸시 아머만 역시 기독교 근본주의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언어, 그들의 신념, 그들의 행동에 직접 참여하면서도 기독교 근본주의 이해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Bible Believers]라는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면, 그녀가 기독교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apologist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empathy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의 감정 또는 느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노력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타자속에 몰입되어 주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도 않고 객관성의 엄밀성에 밀려 타자의 마음이나 구조를 읽어내지 못하는 환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겠죠.
앞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Costco에서 생긴 사건에서 젊은 남성은 자기가실수한 것이 맞지만, 아이가 너무 어려서 그만 자기 마음이 앞서 버렸고, 노인의 경우는 어린 아이를 둔 부모로서 그럴 수 있었다고 나중에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사건의 연속속에서 살아갑니다. 소통과 공감능력은 타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감정의 흥분이 타자의 감정을 읽는 것보다 앞서고 있다는 것을 늘상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또는 너무나 감정적인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제 3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상당한 이해심을 보이지만,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경우 나는 결코 너를 용서하지 못하는 치졸함은 바로 내 마음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제 마음인 셈입니다. 우리는 타자의 현자이지만, 나 자신의 무지는 모릅니다. 쏘크라테스 선생이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주니 만물의 이치니 하는 것은 닥치고, 도대체 인간이란 무언인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는 새로운 인식론의 전환이었는데 말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