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설익은 질문에 대한 답변 깊이 감사합니다.
아래 늘봄님께서 쓰신 글을 통해서 인간이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이거나 상징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는 존재라는 면에서는 잘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그 진술들은 늘봄님의 은유의 신앙 또는 믿음을 서술하기 위한 서두 또는 서론이지 아직 본론으로 들어간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가령, 아래의 글에는 은유와 상징이 큰 차이없이 혼융되어 사용되어 있는데, 우리가 논리를 전개할 때 각각의 개념은 나름대로 배타적인 정의를 갖고 있고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각 개념이 마치 벽돌처럼 나중에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늘봄님의 사상에는 은유와 상징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요?
두번째, 깨달음에 대해서 오강남 선생과 유영모 선생을 인용하셨는데 늘봄님이 생각하시는 깨달음을 좀 더 분석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심층신앙은 표층신앙과 대조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에 어떠한 분석적 설명이 없습니다. 만일에 이런 대조만 하고 왜 대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이것은 선언이지 설명이나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이 "깨달음"의 실재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불교의 선사들의 깨달음을 얻었다 또는 깨달았다는 말을 수없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냥 무식한 중들의 선언일 수도 있구요. 우리가 신에 "대해서"(about)말하는 것과 신"의" 존재(of)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깨달음의 신학"(theology of enlightenment)은 고백이 언어이고 "깨달음에 대한 신학"(theology about enlightenment)은 인식의 언어라고 저는 봅니다. 제가 늘봄님께 여쭙는 것은 바로 후자, 즉 깨달음에 "대한" 신학입니다. 전자는 신자들의 몫이고 후자는 신학자들의 몫입니다. 이와 함께 늘봄님의 "깨달음의 하느님"이 무엇인지 질문을 드렸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말씀이 없으셔서 다시 여쭙습니다.
세번째, "깨달음"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봅니다. 물론 깨달은 사람이 달라져서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집단적 차원으로 확산은 될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이것은 개인적 심리적 차원을 넘지 못합니다. 이런 신학은 어떤 면에서 엄청 진보적일지 모르지만, 즉 신을 깨달음의 심리적 환원이라고 선언할 수 있지만 제가 볼 때 사회개혁적인 전망이나 분석은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마지막으로, 표층신앙과 심층신앙을 구분하시는데,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 이원론입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denotation과 connotation 모두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구사할 때 때론 외포적인 면을 강조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포적인 면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표층신앙과 심층신앙을 구분해서 후자만 강조하게 되면,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자를 강조하는 분들은 영지주의, 불교의 깨달음, 내면, 신비주의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고 저는 봅니다. 늘봄님께서는 이런 이원론을 어떻게 극복하실건가요?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