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믿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느끼고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거지가 앉아. . .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 .”
(누가복음서 16:19-31)
저는 지난 여름 휴가동안에 가족들과 오타와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들이 모여있는 유럽풍의 밤거리로 나아갔습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식당거리를 꽉 메웠습니다. 여러 식당들의 메뉴를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음식값들이 저의 재정 형편으로는 만만치 않은 수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유행에 맞추어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 여기저기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돈이 아니라 25센트 아니면 1불(루니)을 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렸고, 보지 못했던 것을 다시 뒤돌아 보았고, 가슴으로 양심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뒤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그 자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의외로 2불짜리 동전(투니)을 받을 때는 ‘God bless you’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멋진 식당가에 나와서 낭만적인 밤을 즐기려는데 기분잡치게 만드네 하는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드물게 어떤 사람들은 밝은 표정으로 지폐를 건네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떤 부자는 도회지의 상류층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급스러운 옷을 걸치고 매일 파티를 열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항상 즐거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난폭한 사람도 아니었고 구두쇠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문 밖에서 구걸하는 거지 나자로에게 욕설을 퍼부은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행복에 겨워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다른 사람의 가난에 대해서 그것은 자신이 관여할 일도 아니고 가난은 그들의 문제이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아플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눈이 멀었습니다. 누가에 따르면 그는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부유한 생활을 즐김으로써 그 댓가로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누가복음서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저자인 누가가 당시에 잘 알려진 전설같은 이야기를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알맞게 각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전설의 여러 내용 중에 변경하거나 삭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 (compassion)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연대감’(solidarity)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복음서에 기록된 다른 여러 이야기들에서도 누가의 열정과 연민과 연대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하면서 가장 첫 부분에 ‘마리아의 찬양시’ (Magnificat, 1:46-55)를 삽입했습니다. 그 일부는 이렇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6:20-26)의 이야기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 .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에서는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었다. . . 그리고 그 부자는 ‘내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 .’ 고 하셨다.” 고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자가 대단히 부족한 때에 누군가 더 많이 소유하고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누가는 부유함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으며, 이웃의 빈곤과 고통에 눈이 멀게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2001년 9월 11일에 뉴욕 무역센터의 쌍둥이 건물에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서 수 천 명의 귀한 생명이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테러가 왜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지구촌의 부의 분배에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류사회에서 빈부의 차가 극도로 심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테러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의 원인은 가난입니다. 잘사는 나라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나라에 전력과 급수와 석유 공급을 차단하는것은 테러를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어느 누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겠습니까? 북한은 지난 수 십년 동안 극심한 빈곤에 시달려 왔습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극소수의 지도층과 민중 사이의 빈부의 차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한이 진정으로 북한과 통일을 원한다면 지도층과 정치적인 게임을 하기 보다는 서독과 동독의 통일처럼 북한의 민중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는 방법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남한은 통일을 위해서 경제력 우위와 반공을 무력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사심없이 가난한 동족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과 동족의 연대감을 평화적 통일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인류역사에서 전쟁과 테러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강자와 약자가 대립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부자이고 강자이면 전쟁과 테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의 평등한 분배와 힘의 균형이 깨지면 생존의 두려움이 전쟁과 테러를 불러 옵니다.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플리쳐(Plitzer)상을 받은 엘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쓴 “보라색”(The Color Purple)이란 책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슈그 (Shug)라는 여인은 말하기를,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하십니다.” 그 여인은 자연 속에 보라색이 있는 이유는 자연이 우리의 주의를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편견과 무관심 속에서 헛되고 잡다한 일들에 온 정신을 쏟으며 살아 갑니다. 인간의 세계와 생태계가 대단히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일들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소수의 특수층의 경제를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뒷뜰에서 바비큐하는 것으로 못 본체, 못 들은체 하려고 합니다. 텔레비젼에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장면들이 매일같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스포츠 중계나 요리강습이나 집수리하는 체널로 돌려 버립니다. 세상이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회들은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하늘에 계신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기적같은 축복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찬양하고 통성기도와 방언을 하면서 내세의 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메튜 폭스(Matthew Fox)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의 개신교는 무감각, 또는 우리의 조상이 ‘나태’라고 말한 에너지의 부족이나 일종의 영적인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힘들어하고 있다.” (참고: ‘A New Reformation,’ Matthew Fox, p.7)
우리는 자연의 보라색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과 세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누가는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빈부의 극심한 차이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누가복음서의 이야기의 부자는 세칭 멋있고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고, 매일 잔치상에서 좋은 음식들을 즐겼습니다.
누가복음서의 이야기 전체에서 이 부자가 사악하다거나 자선을 베풀지 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전박대를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지적하는 이 부자의 폭력은 극심한 빈곤의 차이에 대해서 덤덤하고 무관심하고 냉담했던 것입니다. 이 부자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눈이 멀었습니다. 유대교에서 자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교리적인 필수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자선 또는 선한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 (compassion)과 ‘운명을 함께 하는 연대의식’(solidarity)이 없는 자선은 사심으로 가득한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