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배운 지질학(천체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과 성서비평학과 교회사와 신학에 따라 고대에 기록된 성서를 21세기의 언어와 사고로 ‘재해석’하여 읽는다. 나는 성서를 재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20년 동안 전문목회에서 나의 새로운 렌즈로 읽은 성서의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쳤다. 물론 나의 신학공부를 도와준 멘토들이 가르쳐 준 것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진화과학은 나의 종교적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고대 성서를 ‘재해석함’으로써 직역주의와 근본주의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탄생하면서 성서의 문자주의/직역주의에서 벗어나 역사적 예수를 되찾자는 양심선언이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운동의 선구자들은 교회에서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예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신앙과 삶을 위하여 성서를 ‘새롭게 읽는 모범’을 자신의 고향 회당에서 보여주었다. 1세기의 유대인 예수는 500여 년 전 페르시아제국 시대에 기록된 이사야서(61:1-2, 58:6)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로마제국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누가복음서 4:18-19)로 전환했다. 예수는 성서를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책으로 믿지 않았으며, 직역적으로 읽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로 ‘재해석’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성서를 문자주의와 직역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 역사적 예수는 종교체제가 사람들에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암송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21세기에 다양한 인종들과 종교들과 문화들이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1세기의 고대 유대인들이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 속에서 기록한 성서를 첨단과학의 민주주의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인간의 의식의 진화 속에서 계몽주의가 탄생하면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깨달음과 함께 ‘역사적 예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30여 년 전에 미국의 ‘예수 세미나’ (www.westarinstitute.org)에 속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예수를 상업적인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하늘에 갇혀있는 하느님을 땅으로 석방시키기 위해 ‘종교 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연구소(www. historicaljesus.co.kr)가 역사적 예수의 서적들을 번역 출판하고 ‘예수살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그 일환으로 성서 새롭게 읽는 교육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참고: 몸학기독교연구소 www.freeview.org ; 종교너머, 아하 www.njn.kr (오강남 박사가 인도하는 영성기관); Canadian for Progressive Christianity www.progressivechristianity.ca )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신중하게 읽으면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내용이 서로 독특하게 다른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두 번째 이야기(2:4-25)는 첫 번째 이야기(1:1-2:3) 보다 약 500년 앞서 기록되었고, 첫 번째 이야기는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 포로시절이 끝이나고 페르시아제국으로부터 자유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국가의 재건축을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전승들(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책이다. 창조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타향에서 오랜 포로생활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만물이 모두 새롭게 보였고 하느님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할 비전이 생겼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새로운 힘과 용기와 희망과 기쁨이 억제할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창세기는 2500년 전에 ‘삼층 세계관’을 가진 고대 유대인들이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땅 새로운 하늘을 가슴으로 체험한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고대인들은 내면으로부터 새로운 시작, 새로운 신앙과 삶, 창조성 하느님 즉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았고 이 모든 체험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기원 전 6세기에 쓰여진 창세기는 문학 형식에 있어서 기원 전 10세기에 쓰여진 호머의 서사시들과 매우 흡사하다. 창조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창세기는 역사책이나 과학책이 아니라 서사시적인 신화이다. 21세기의 양자 물리학에 근거한 우주관을 가진 현대인들이 고대 신화를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더욱이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무수한 사본들만이 존재한다. 현대 성서는 그 사본들 중에서
부분적으로 선별한 것이다. 성서는 인간이 내면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본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성서는 인간들의 생존의 두려움과 욕심과
편견과 사심 때문에 오류와 모순투성이지만 우주적이고 궁극적인 하느님의진리가 담겨져 있기에 진실한 책이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한계성을 초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신화’이다. 신화는 허황된 이야기 또는 여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는 인간들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신화는 항상 인간과 함께 존재한다. 왜냐하면 신화는 인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체험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기 때문이다. 신화는 단순히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확신하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이야기이다. 신화는 인간의 본능적인 정체성이다. 영국의 신학자 돈 큐핏은 ‘하느님은 인간의 신화’라고 말한다.
성서를 직역주의/근본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롭게 읽음으로써 성서를 신화라고 이해하는 것은 불신앙이나 이단이 아니다. 오히려 심층의 신앙인, 참 인간이 되는 구원의 길이다. 성서를 해방시키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몸과 이성과 감성과 영혼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이다. 또한 이 순간은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는 때이다. 성서를 새롭게 읽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종교적 감각을 갖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참고: Marcus J. Borg, ‘성경 새롭게 다시 일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존 쉘비 스퐁,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돈 큐핏,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존 도미닉 크로산, ‘어두운 간격’,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Joseph Campbell, ‘The Power of Myth’, Anchor Book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