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동방박사 신화의 별은 우리의 내면의 별이다. 기독교 교회력에 따르면 성탄절이 끝나고 1월 6일에 시작하는 새해의 새로운 절기를 현현절(顯現節)이라고 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이 절기에 동방박사 이야기를 읽는다. (마태복음서 2:1-12) 물론 동방의 현인들이 예수를 방문한 이야기는 예수 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하느님이고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진실한 종교라는 배타적인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동방의 현인들이 아기 예수에게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가져와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세대들에게 감동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가 되어 왔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동방의 현인들이 예수를 방문함으로써 예수는 종교와 문화와 인종의 장벽을 넘서는 길이 되었고, ‘예수의 정신’은 다원주의의 우주적인 세계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방의 현인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온 그들의 용기와 지혜는 신비스럽고 경이롭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1900여년 전에 어느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 탄생의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창작한 전설적인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를 만든 목적은 독자들이 문자적으로 읽고 정확하게 암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오로지 마태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세월이 흘러가면서 원래의 이야기에 여러가지 새로운 내용들이 첨가되었다. 좋은 예로, 마태의 이야기에는 동방박사가 몇 사람인지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세 가지 선물 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세 사람이 찾아 온 것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그들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낙타를 타고 왔다는 말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동방박사가 몇 사람이든 그들이 낙타를 타고 왔던 이 모든 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의 성서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고대 성서 전체는 일종의 전설이기 때문에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전설 속에 보이지 않게 숨겨진 참 진리를 찾아서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 참 믿음이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힘이 있고 ‘예수의 정신’을 증거하려는 것에 있어서 진실하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동방의 현인들은 어두운 밤에 새로운 진리 탐구를 위하여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 저자가 확신한 예수의 정신은 인간의 존엄성과 하느님의 의미와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고 새로운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방박사 이야기의 의미는 암흑에서 빛을 찾는 것이고, 과거의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잘 알지 못하고 불편하고 모험이 따르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구태의연한 교리와 형식에 안주해서 안일하게 살기 보다는 창조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삶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기독교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의 공동체는 로마제국의 혹독한 통치 아래 빈곤과 질병과 절망 가운데 캄캄한 암흑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따라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동방의 현인들로부터 자신들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밝은 빛을 보았다. 이 빛을 보는 순간 사고방식이 달라졌고 말하는 것이 달라졌고 사는 모습이 달라졌다. 비겁함이 용감함으로, 이기심과 사심이 자비함으로, 편견과 배타심이 포용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원한이 용서로 변하는 체험을 가졌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빛을 본 것이었고, 그 빛은 ‘예수의 정신’이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동방의 현인들로부터 깨달아야할 것은 그들은 말 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사람들이었으며, 믿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별’을 보고 그 별을 쫓았던 사람들이다. 고대 세계에서 이상한 별을 보고 쫓는다는 것은 대단히 용감한 결단이었고 또한 위험한 일이었으며 어쩌면 바보스러운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동방의 현인들은 자신들의 여정에서 편안한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호화스러운 헤롯의 왕궁에서 자신들의 여정을 중단하고 머물기 보다는 아기가 누어있는 구유로까지 계속해갔고 거기에서 완성했다. 동방의 현인들은 헤롯왕처럼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가치관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헤롯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과 명령과 순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그대로 현상 유지하기를 원했다. 반면에, 이 현인들은 현상 유지를 위한 권력이나 명령이나 형식 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주는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새로운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찾기 위해서 지혜와 진리가 있는 그곳이 아무리 멀고 위험하고 불편한 길이더라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면 메세지를 전하는 ‘인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리는 ‘메세지’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수가 하나님이냐, 실제로 살아있었느냐, 물 위로 걸었느냐, 그의 육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느냐 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소중한 것은 예수의 정신,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이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느냐 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정신을 따라 현상에 메어달려 생기없이 덤덤하게 살아가는 생활을 박차고 일어나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새롭고 비범한 신앙과 삶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과 편견과 욕심이 안전하고 편안한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유혹할 때에 가능성이 없는듯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도하는 ‘내면의 별’을 따라 가야 한다. 따라서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꿈’이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가능성이 없는듯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꿈이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나의 별만 쫓아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별도 보면서 모두가 함께 별을 쫓아가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걸어간 길이고, 예수가 기독교인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