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구입해서 당시 딱 한번 읽고 책장에만 꼽아 두었던 일본 대하역사소설 ‘대망’을 최근 다시 꺼내 읽었다. 장장 4개월 하고 22일 걸렸다. 필자가 소장한 책은 박재희씨 번역본으로 (동서문화사) 총 20권(각 400쪽)이므로 권당 7.1일 걸린 셈이다. 최근에 같은 출판사에서 재 출간 된 건 700쪽으로 늘려 12권짜리로 나오고 있다.
일본 원제는 ‘도쿠카와 이예야스(덕천가강)’인데 한국인의 감정을 고려해서 번역본은 ‘대망’으로 바꿔 들여왔다고 한다.
필자는 그 동안 다양한 대하역사소설들을 접했지만 약 10여년 전부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열국지’를 내 인생의 지침서로 삼고 이 책 읽기를 반복해 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히 대망을 다시 꺼내 들면서 내 인생의 지침서가 ‘열국지’에서 ‘대망’으로 옮겨지게 되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소설이 원래 그렇듯이 등장 인물들의 세세한 심리변화나 감정에 대한 표현들이 잘 되어 있는데, 특히 대망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최고 수준의 책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뿐 아니라 각각의 등장인물로 시시각각 관점이 옮겨가면서 각각의 미세한 심리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서술해 나가는데, 역사서로도도 훌륭하지만 인생의 지혜서, 그리고 처세술 교본으로도 훌륭한 책이다.
전국이 전쟁으로 물들었던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들이 기기묘묘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정치인, 사업가, 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처세술과 필독서로 각광받았으며 한국에서도 70~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모은바 있다.
소설 ‘대망’은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가 있었듯이 일본도 이때는 전국시대 (the age of civil wars)였다. 당시 오나 노부나가가 전국을 거의 통일해 나가다가 노부나가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그의 부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체를 하나로 묶어 통일을 시켰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 대망의 주인공 도쿠가와 이예야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향후 250년간 일본의 통일과 평화 시대를 여는데 주역이 되었고 그는 현재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3대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겼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영웅이 거의 없고, 몇몇의 영웅조차도 국민들의 가슴속 보다는 교과서에만 남아 있을 뿐인데,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도쿠카와 이예야스’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이고 그를 훌륭한 소설 속에서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그들이 지닌 문화적 자산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하역사 소설들을 손꼽는다면 태백산맥, 장길산 등을 있겠으나 주인공들은 모두 역사의 비극적인 수레바퀴에 치여 허무하게 사라졌을 뿐임을 상기해 본다면 그들이 부러울 뿐이다. 근대에 전봉준, 김구, 장준하, 백기완, 노무현 같은 인물들 조차도 우리들의 영웅으로 만들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대망을 읽으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따로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대망을 언급하는데 있어 약 420년전 벌어졌던 임진왜란(1592년 발발)을 빼 놓을 수 없다. 그 동안 임진왜란은 역사책이나 소설, 영화 등을 통해 접할 기회는 많았으나 모두 우리 쪽 시각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왜란의 주역은 히데요시와 이예야스로 그 동안 나는 알고 있었는데, 실제 그 두 명은 전쟁 동안 단 한번도 조선땅을 밟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인물은 히데요시일뿐 이예야스는 임진왜란 발발에 대한 직간접적인 책임이 없음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후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 중국, 인도와 유럽까지 통일하겠다는 허무맹랑한 포부를 가지고 대륙 출병에 나서는데 이 소설에서도, 히데요시의 이러한 야망이 얼마나 헛되고 무모했는지를 잘 서술되어 있다. 한 사람의 헛된 야망으로 7년간 조선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 소설 속에 왜란에 대한 내용들이 나올 때면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특히 당시 일본군은 수많은 내전을 거치면서 단련된 백전 노장들이었고 잘 훈련되고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었다. 게다가 서양과의 문물 교류를 통해 이미 총도 지니고 있었으니…… 이런 거대하고 무서운 세력을 앞세운 히데요시는 1590년 전국을 통일하면서 그 힘을 대륙출병으로 돌렸으니, 실전 경험도 없고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안이함에 젖어 무방비 상태로 살던 조선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한 셈이었다.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대륙 출병은 망상이고 실현 불가능이라는 의견들이 일본에서도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운명이었던지 수많은 우연들이 하나하나 꿰 맞추어 가면서 비극의 전쟁이 필연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소설 속에서 접하면서 임진왜란 내용이 나오는 동안 내내 안타까움과 울분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우선 히데요시가 말년(60세)에 얻은 첫 자식이 두 살도 안되어 사망하면서 그의 판단력이 상당히 흐려졌다는 점, 그리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서 중국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펄쩍 뛰었으나 일본의 사신들은 히데요시에게 욕 얻어먹고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조선에서 흔쾌히 길잡이를 해준다는 거짓 보고를 한 게 비극의 첫 시작이었다. 이후 조선이 길을 내어주지 않는 다는 사실들이 일본 조정에도 알려졌으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대륙출병은 애초에 망상이었음은 개전 초기부터 곧바로 증명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이순신 장군에게 해전에서 완패하면서 그들의 고난은 시작되었고 조선은 대륙 출병의 길잡이가 아닌 철저한 수문장이 되면서, 일본은 졸지에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나라 중국 또한 호락호락 당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무모하게 일으킨 임진왜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7년간의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에게 남겨졌으니 왜란 대목에서는 정말 맘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왜란이 끝난 400년 후에도 2차세계대전을 통해 세계통일을 꿈꾸었으니 그들만이 지닌 특유의 저력이나 기질과 망상은 실로 놀라울 뿐이며 이러한 무서운 나라를 이웃으로 둔 힘없는 우리에게는 항상 크나큰 두려움일수 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는 좁은 나라마저도 두 동강 나 있고 당분간 합쳐질 기미는 없어 보이니 답답할 뿐이다.
쇄국과 개방
소설 대망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본의 빠른 개방 정책이다. 450년전부터 이미 중국, 인도, 동남아는 물론 유럽 열강들 및 멕시코등과도 교류를 시작한 건 놀라운 일이다. 유럽 선교사가 일본땅을 처음 밟은 게 1549년이라고 하니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보다 훨씬 빨랐던 셈이다.
섬나라답게 빠르게 외국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한국은 1800년대 말까지도 쇄국정책을 펼치다가 결국 열강들의 제물이 된 것을 볼 때 선조들의 혜안 없음도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의 남한과 북한 그리고 주변의 열강들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150년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니 이 또한 힘이 빠지는 대목이다.
삼국지 - 열국지
일본 대하역사소설 ‘대망’을 언급하면서 중국의 ‘삼국지’를 빼놓을 수 없겠다.
한국에서는 오랜 세월 나관중의 삼국지가 최고의 소설로 손꼽힌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제목은 삼국지이지만 실제 내용은 유비의 촉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내용상의 과장과 확대 수준이 할리우드 영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제갈공명과 관우에게는 신화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역사를 기록한 지혜서라기 보다 무협지나 액션오락물에 가깝다. 실제 삼국 중에서 촉 나라의 비중은 조조의 위 나라, 손권의 오나라보다 훨씬 작았기에 이 소설 속의 과장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하는 운동이 최근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 지혜와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열국지를 추천할 수밖에 없다. 12권의 방대한 분량에 등장인물도 수백, 수천 명에 달하지만, 따로 주인공을 두지 않고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서에 더 가깝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 하나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기초로 해서 선조들의 지혜와 교훈들이 담겨 있는데 교양서적으로는 물론 처세술 교본으로도 그만이다. 2,200년전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을 그린 초한지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균형 잡힌 역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춘추전국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인 기원전 8세기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3세기까지 약 550년간의 시대를 일컫는다. 최근에는 열국지가 다양한 번역본으로 그리고 어린이용 도서까지 나와있지만 그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인정받는 판은 풍몽룡 원저, 김구용 선생의 번역본인 민음사의 ‘동주 열국지(列國志)’이다.
소설 ‘대망’은
원제 ‘도쿠가와 이에야스 (徳川家康)’는 1950년 3월부터 1967년 4월까지 홋카이도 신문, 도쿄 신문, 주니치 신문, 서일본 신문에 연재된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소설. 소프트 커버판, 고단샤 문고판을 지나, 현재 고단샤의 야마오카 소하치 역사문고(전26권)가 발행되었고,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주인공인 이에야스의 생모, 오다이의 혼담부터, 이에야스 사망까지의 70여 년간을 그리고 있다. 완성을 위해 사용된 원고용지는 400자 원고지 17,400장에 달한다. 소설 ‘태백산맥’의 두 배 분량이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중 종군작가로써 많은 특공대원을 취재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느낀 일본의 존속이나 세계 평화에로의 기원을 마음속에 간직했던 그의 마음을, 이에야스의 원했던 '태평(泰平)'에 겹쳐 글을 썼다.
연재 당초에는 신흥의 오다 가와 초대국(大國)인 이마가와 가의 사이에 끼여, 독립도 뜻대로 되지 않는 마쓰다이라 가의 고난과 발전을, 당시의 일본의 모습에 겹쳐서 생각하는 독자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메이지 이후의 일반적인 이에야스의 이미지에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진지하게 노력하는 이에야스.’, ‘어떻게든 오사카 전투를 피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목숨을 살려주려는 이에야스.’, ‘황실을 공경하는 생각이 두터운 이에야스.’ 의 이미지가 되어 ‘너구리 영감 이에야스’ 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다. 후에는 비즈니스 본으로써 평가되어 경영자의 교과서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자이언트 바바나 요코야마 미쓰테루 등, 각계의 저명인사도 애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 ‘대망’(전 12권)이라는 제목으로 첫 출판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중국에서도 2007년 가을에 발행한 이후 전 13권 200만 부가 팔려 베스트 셀러가 되어, 높은 평가를 얻었다.
애로점
일단 방대한 분량에 등장인물들도 수없이 많다. 이름 자체도 어려워서 외우기 힘이 드는데 가뜩이나 저자는 성+이름을 합쳐 쓰지 않고 때에 따라 성, 이름만 따로 명기 할 때는 더더욱 난감하다. 열국지나 대망을 처음 읽을 때는 등장인물을 노트에 적어가면서 읽는 게 좋다.
전투장면이나 전쟁 장면은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무협지로 기대하고 보면 실망이 클 수 있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조선땅에서의 전투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며 이순신 이름도 20권 책에서 딱 두 번 나올 뿐이다.
소설 대부부분은 줄거리 서술 보다는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와 각 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서술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끝)
대망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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