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경전들이 밝히는 도덕과 윤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최선이었지만,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혼돈을 불러 일으킨다. 예를 들자면, 성서적 도덕과 윤리는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인종차별, 우월주의, 배타주의를 정당화하지만,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이 도덕과 윤리를 수용하지 못한다. 한편, 삼층 세계관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도덕과 윤리의 유일한 기초라고 믿는다. 따라서 기독교 성서의 십계명이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십계명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에 대해 모른다. 또한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변함없이 동일하다고 잘못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에 기록된대로 문자적으로 안식일(토요일)을 어긴 사람을 처형하지 않는다.(민수기 15:32-36) 또한 결혼 전에 처녀성을 잃었다고 또는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았다고 돌로 쳐서 죽이지 않는다.(출애굽기 21:17, 신명기 21:18-21) 더욱이 21세기에 누가 누구를 돌로 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성서의 명령이 모호할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 성서가 밝히는 가치관과 도덕은 지난 수천년 동안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음과 같이 진화되었다: ‘하느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돌로 쳐 죽여야 한다’ 는 모세의 도덕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는 초대 기독교의 도덕으로 진화되었고, 진화과정은 계속되어 ‘온전함을 이루어 살지 않으면, 불행하다’ 는 개인적인 진화적 도덕으로 성숙해졌다. 최근에는 ‘이기적인 욕심을 지구적 웰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외로움과 두려움에 빠진다’ 는 전체웰빙의 진화적 도덕으로 발전했다.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를 인간의 뿌리와 본성에 대한 이야기로 포용하는 현대인들은 도덕과 윤리에 대해 문자적으로 고대 경전들에 근거하지 않고, 21세기의 과학과 지식과 경험에 기초하여 분별한다. 물론 고대 경전들을 ‘은유적으로’ 읽으면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용서와 원한, 자비심과 욕심, 용감함과 비겁함, 희망과 절망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은밀하게 신화적으로 담고 있는 고대 경전은 21세기에도 진실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의 사람들은 교리적-제도적-이분법적-초자연적 하느님 없이도 선할 수 있다 는 인도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신적 계시는 무엇인가? 또한 하느님의 계시가 지난 138억 년 동안 끊임없이 우주진화에서 드러났다면 성서는 무엇인가? 또한 과학시대의 종교적 예배와 영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성서는 우리가 자율적으로 삶의 생기와 희망과 위로를 발견하는 곳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의식을 통해 발견한 우주진화 이야기는 성서이다. 즉 과학이 발견하고 밝히는 공개적 계시는 성서이다. 성서는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깨달음의 참된 인간이 되라고 요청하고 도전하고 격려한다. 무엇보다 성서는 어느 한 개체도 제외되지 않는 전체의 웰빙을 위해 실천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이다. 필자의 성서는 진화적 온전함을 이루어 가도록 힘과 지혜를 불어넣어 주는 모든 것들이다. 시, 영화, 책, 손주들의 모습이 나에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겸손하고, 진실하고, 책임감을 느끼고, 사심없이 봉사하도록 격려한다면 이것들은 나의 성서이다. 그러나 비단 기독교 신구약 성서의 어느 구절이나 책이 이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나의 성서가 될 수 없다. 우리들은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를 성스러운 시각으로 인식하면 이것이 인류에게 최초의 성서(경전)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이 돌판과 양피지와 파피루스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한 경전들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우주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경전은 우주 이야기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가 온 인류의 원초적인 경전이라면, 과학은 경험적 신학이고 과학자들은 경험적 신학자들이다. 과학자 칼 새강은 종교인들에게 ‘과학은 종교적 예배 형식에 도입될 수 있다’ 고 도전한다. 우주와 은하계와 태양계와 지구의 창조적이고 진화적인 출현으로 생명체들과 인류사회가 등장했으며, 이 최초의 계시를 과학자들은 공개적 계시라고 한다. 우리는 이 과학적인 발견으로부터 성스러움과 경이로움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인들에게는 선험적이고 실천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 계시, 우주 이야기는 21세기 현대인의 경전이다.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전통적인 종교인들은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과학이 답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샘 해리스는 21세기에 과학이 인간의 가치들을 형성하고 무엇이 훌륭한 인생을 구성하는지를 인도하는 도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과학은 도덕을 판단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오늘날 과학과 이성과 지성이 우리의 삶의 본질과 가치를 결정한다는 명확하고 새로운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인습적인 삼층 세계관적 신앙은 ‘신 없이도 선할 수 있다’ 는 우주진화적 신앙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과학이 도덕과 윤리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21세기의 도덕적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를 인식하고, 생명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화과학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인간의 의식적 경험의 긍정적 상태인 행복에 관한 과학이다. 도덕은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과학적인 가치관이며 삶의 방식이다. 인간의 행복은 세상의 사건과 뇌의 상태에 의존하므로 과학적 사실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상세한 과학적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삶의 방식이 더 좋고 나쁜지, 어떤 패러다임이 사실에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또는 더 윤리적이고 덜 윤리적인지 판단할 수 있다.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예를 들자면, 건강에 좋은 음식이 영원히 오직 하나라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21세기의 통신과학, 기술과학, 생명과학, 진화과학과 어울리는 종교적-도덕적 삶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종교와 문화와 과학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통합한 영역 안에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의 한계를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전통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삶은 도덕적인 삶이 아니다. 자율적인 도덕성과 의식의 시대에 타율적인 종교를 신봉한다는 것은 겉치레일 뿐이다. 오늘 과학시대에 종교적 영성을 보존하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첫걸음은 과학이 발견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이야기를 우리의 성스러운 이야기로 인식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종교와 도덕과 윤리는 형이상학적 하느님을 관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넘어선 초월의 영역보다는 오히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철저한 영적 자율 속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타자가 우리를 위해 써 준 각본에 따라 살기보다는,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자신의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100% 책임지며 사는 것이 삶의 참의미 라고 인식한다. 사심으로 가득한 보상심리의 타율적인 종교는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기 때문에 거짓 종교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종교는 도덕과 윤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없이도 선할 수 있는 자율성과 잠재력과 창조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