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요청이고 방식이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살아가는 포월적(包越的) 실제(實際)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상가 켄 윌버는 우주진화의 본질을 '포함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envelopment’ 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포월(包越)이며, ‘포함하면서 넘는다’는 뜻이다. 즉, 우주진화의 성격은 이전 것을 포함하면서 이를 뛰어넘어 보다 나은 새로움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관은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초월적 유신론 내지는 인간과 분리된 상대적 객체적 유신론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타자, 초월자, 전능전능자 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고전적 유신론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하느님은 세계에 대한 초월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와 함께 포용하면서 경계 넘어 진보해가는 포월적 하느님이다. 오늘날 초월이 아닌 포월적 진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미세한 입자들에서 거대한 별들에 이르는 모든 계층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우주에서 하느님의 의미는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느님이란 말은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묘사한다면 ‘모든 것들을 사랑함’, ‘모든 것들을 이해함’, ‘모든 것들을 포용함’, ‘모든 고통들과 함께함’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대한 규모와 미세한 규모를 함께 포용하는 의미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는 ‘실제적이고 전체적인 현실’은 창조적이며 성스럽다. 여기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필요없으며 오직 하느님이란 말의 심층적인 의미를 인식할뿐이다. 우리의 집 우주에는 소입자들이 원자들을 구성하고, 원자들이 분자들과 세포들과 유기체들을 구성하면서 규모와 복잡성이 확장되고, 공동체들을 이룬다. 거대한 은하계들은 작은 은하계들을 포함하고, 은하계들은 태양계들과 수많은 별들로 형성된다. 우주를 이루는 각각의 모든 개체들은 홀론(holon)이다. 홀론은 자신이 전체이며, 더 큰 전체의 개체인 계층구조를 드러낸다. 모든 계층들에서 각각의 홀론들(개체이며 전체, 전체이며 개체)은 고유의 창조성과 힘이 있다. 태초에 창조성이 출현한 우주의 실제적인 현실은 믿는 문제가 아니다. 이 체험적인 사실은 무신론자들과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인정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가 출현한 우주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 위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인식하면 하느님이란 말의 심층적인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138억년 전 빅뱅으로 출현한 우주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현대인으로서 필수적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주는 거짓이나 상상이 아닌 실제적인 현실(Reality)이며, 138억년의 우주진화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각에서 하느님은 실재적(實在的)이지 않고, 오직 하나의 유일한 창조적 실제(實際)이다. 이 우주에서 하느님의 의미는 만물의 통합적 비전이기 때문에 만물과 분리될 수 없고, 만물에 내면화되어 있는 ‘실제의 전체’(The Whole of Reality)이고, 모든 창조적 실제들을 포용하고 모든 경계선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실제’(Ultimate Reality)이다. 즉 하느님이란 말은 내재적인 의미이며, ‘경계 넘어의 실제’를 뜻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아 아는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움과 황홀함이며, 삼라만상에서 보편적으로 느끼고 깨달아 알 수 있다. 하느님이란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경계선을 그어 제한된 영역 안에 가둘 수 없고, 독점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우주전체 즉 온우주(Kosmos)이다. 개체들이 모인 전체, 작은 전체들로 이루어진 더 큰 전체, 우주라는 하나의 전체가 하느님이다. 종교인들이 하느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관념적으로 믿기 보다는 어떻게 실천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정과 사회와 세계의 어느 한 개체라도 소흘히 대해서도 안되며, 두려움과 사심을 버리고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다 는 말은 하느님의 의미를 퇴색시킬뿐이다. 하느님이란 인간의 삶의 요청이고, 깨달음의 길이고, 사는 방식이다. 하느님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비전이다.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속임수를 쓰는 마술사의 주술도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느냐 안믿느냐의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낭비이다. 그대신 어떻게 하느님이란 실제를 몸과 마음으로 살아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