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가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싸르니아에게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기억이 많은 도시다.
오사카를 경유해서 부산으로 갈까 했는데,
서울에서 처조카로부터 결혼식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설명을 하겠지만,
결혼식 주인공인 그 처조카로부터 약 1 천 만 원 가량의 한화를 받아내야 할 미션도 생겼다.
첫 착륙지점을 부산에서 인천으로 변경한만큼
여행노트 첫 장에 이번 가을여행 타이틀을 2016 Operation Chromite 라고 적어 보았다.
사실 올 가을엔 한국에 안 가려고 했었다.
대신 늦은 10 월에 교토와 오키나와에서 두 주일 정도 가을휴가를 보내려고 맘 먹었었다.
가을에 결혼하는 주인공은 와이프 언니의 딸이다.
따지고보면 처조카라 부르기에는 좀 애매한 점이 있다.
싸르니아가 와이프와의 부부관계를 공식종료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통 헤어진 부부처럼 서로 등돌리고 지내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 식사하고 차를 마신다.
작년 9 월에는 벤쿠버에 함께 다녀왔고, 지난 6 월에는 뉴욕에서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나라간의 관계로 비유하자면
대사급 외교관계를 단절한 대신 서로 무역대표부를 운영하면서 통상관계를 유지하는 정도다.
이번 가을에도 한국에 같이 들어간다.
다만 비행기는 3 일 시차를 두고 각각 따로 타고간다.
비행기 함께 타고 가다 함께 떨어지면 아이가 혼자된다는 와이프의 강력한 의견 때문에 발권을 따로 했다.
이번에 결혼하는 처조카는 와이프와의 부부관계 종료하고는 상관없이 싸르니아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다.
걔는 중학교 3 학년 때 유학을 왔는데,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가 데리고 있었다.
말이 많고 성격이 까다로운 자기 이모보다는,
조용하고 품성이 온화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아이 아빠인 동서 뿐 아니라 엄마인 처형과도 친해서 한국에 갈 때마다 동서부부와 어울리곤 한다.
지난 번 맛집 소개할 때 올린 한정식집은 그 동서부부와 함께 간 곳이다.
둘 다 해병대 출신이 아닌데도,
한 번 동서는 영원한 동서라며 자주 어울리곤 한다.
가족관계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렇게 자주 만나 어울리는 동서-처형-제부지간은 별로 없을 거다.
부조금은 얼마를 내야할까?
처조카라고는 하지만 공적인 가족관계가 소멸했으므로 일반하객 처럼 부조금 10 만 원 + 밥값 5 만 원 정도 내면 될까?
아니면 이모부라는 '전관예우'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이니 그보다 더 내야할까?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제 내가 받을 돈 천 만 원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내가 처조카로부터 돈 받을 게 있는 걸 안 건 좀 오래 전에 우연히 발견한 저 카드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일종의 차용증이다.
저 카드형 차용증을 통해 내가 그 아이에게 약 천 만 원 상당의 채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1 년 전이라면 저 아이가 고등학교 3 학년 때다.
내가 무언가 저 아이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통 생각이 안난다.
은혜를 베풀었다기보단, 무슨 일인가 이모나 한국에 있는 부모님한테 알리지 말아달라는 조건의 거래였던 게 분명하다.
그런 추측이 드는 이유는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연도만 쓰고 날짜를 빼먹은 걸로 봐서 다급했던 당시의 상황도 엿보인다.
나중에 돈벌면 일등석 비행기표 (약 천 만 원)를 사 주겠다는 내용임을 누가봐도 알아볼 수 있다.
빨간 밑 줄은 내가 그은거다.
그러고보니 당시 구두로도 그런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처조카의 구체적인 직업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나이에 비해 고액연봉을 받는 전문직이다.
따라서 채무이행을 당당하게 요구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부자지간에도 돈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인 것은 처조카에게 장점에 속하는 성격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첫째 의리가 있고, 둘째 빈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저 카드를 가지고 가서 처조카에게 보여 준 후
11 년 전, 네가 나한테 써 준 이 카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어 볼 계획이다.
우선 11 년 전 당시 자기 이모나 부모님께 알려지면 안 되었을,
헌데 나는 알고 있었던 처조카의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그것부터 기억해 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