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톰 웨이츠의 네번째 앨범 <스몰 체인지>(Small Change) 재킷. 정준화 제공
옷차림에 관한 한 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보수주의자라 쇼핑에서 모험을 시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치명적인 실수만 피하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우물쭈물 진열대를 기웃거리곤 한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게 되는 옷들이 죄다 엇비슷하다. 팔할은 무채색이고 아주 가끔 어두운 파랑이나 풀이 잔뜩 죽은 녹색을 집는 정도다. 격자무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과감한 패턴일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온갖 색과 프린트를 뒤섞어 입으면서도 서낭당처럼 보이지 않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느낀다. 알록달록한 옷가지 사이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눈썰미는 제2외국어만큼이나 익히기 힘든 기술 같다.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부류는 사실 따로 있다. 평범한 옷을 전혀 평범하지 않게 소화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능력은 제2외국어처럼 노력으로 연마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차라리 카니에 웨스트(미국의 힙합 뮤지션 겸 디자이너로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함)의 나르시시즘처럼 타고난 자질에 가깝지 않을까? 내 옷장에도 검은 재킷, 검은 바지, 그리고 흰 셔츠는 언제 이렇게 사들였나 싶을 정도로 여럿이다. 해리 포터의 투명망토같이 존재감을 안전하게 지워주는 차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와 별다를 것 없이 밋밋하게 걸치고도 괴상하고 근사하게 도드라지곤 한다.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촬영한 <호시스>(Horses) 앨범(펑크록의 대모로 불리는 패티 스미스의 데뷔 앨범) 커버의 패티 스미스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다. 한 명을 더 보탠다면? 여기서는 <스몰 체인지>(Small Change) 재킷(사진) 속의 톰 웨이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뮤지션이자 배우인 톰 웨이츠는 이른바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자신보다도 유명한 팬들을 잔뜩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영화감독 짐 자무시는 “톰 웨이츠의 음악을 모른다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고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배우 스칼릿 조핸슨은 웨이츠의 곡만 모아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안타깝게도 그의 노래 실력이 연기력만큼 훌륭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이 음반으로 증명이 됐다). 포크, 블루스, 재즈, 록 등 온갖 장르를 이겨 빚어낸 눅진한 멜로디와 담담해서 더 쓸쓸한 가사는 열렬한 추종자를 차곡차곡 양산했다. 1976년에 발표한 <스몰 체인지>는 그의 통산 네번째 앨범이다. 데뷔 무렵만 해도 요철이 많지 않던 목소리는 이미 완연하게 거칠어진 상태다. 사진가 조엘 브로드스키가 촬영한 커버는 무대 뒤의 허름한 대기실 풍경을 담고 있다. 배경에서 나른하게 눈을 굴리는 스트리퍼(이후 섹시한 뱀파이어 캐릭터로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 커샌드라 피터슨이 모델로 등장했다)는 공연장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다.
그리고 톰 웨이츠는 담배 연기가 떠도는 프레임 안에 검은 슈트와 흰 셔츠, 그리고 검은 타이를 맨 채 걸터앉아 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카니에 웨스트의 겸손함만큼도 없는 스타일링인데, 이 남자의 모습은 이상하게 시선을 틀어쥔다. 일견 말쑥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옷깃은 나달나달 닳은 상태일지 모른다. 바짓단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과 함께 고단한 사연들이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톰 웨이츠의 스타일은 그가 지닌 이야기에 의해 완성되는 느낌이다. 암담하면서도 시적인 가사와 성대를 긁으며 터져 나오는 듯한 보컬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이 평범한 차림에 특별한 인상을 더한다. 원색이나 프린트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존재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