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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은 '덕혜옹주'에 열광하는가
작성자 clipboard     게시물번호 9355 작성일 2016-08-25 06:38 조회수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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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여행은 의미있는 문화기행이 될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할 일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을 사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덕혜옹주'를 관람하는 것이다. 


초판이 출간된지 10 여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작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완용 평전' 현상과, 

이미 관람객 500 만 명을 넘어서며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 '덕혜옹주' 현상 사이에는 전혀 상반된 정서가 존재한다. 


이완용 평전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어느 역사학자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근거로 대한제국 멸망사를 새롭고 정직하게 조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지상주의에 근거한 집단정서가 온 나라의 숨통을 조여왔던 야만적 풍토에서 강요된 상식을 거부하고 사실관계를 용기있게 진술한 저자는 근대사학자가 아니라 기자 출신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아만적 풍토'라는 말은 싸르니아의 말이 아니라 원로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했던 말이다. 그는 이막동 선생(세종)의 훈민정음 제작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은퇴하고나서야 이렇게 표현했다)     


영화 '덕혜옹주'가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에는 정반대의 집단정서가 자리잡고 있다. 


고종의 막내딸 이덕혜의 일생을 픽션으로 그려놓은 이 작품은 영화라는 편리하기 짝이없는 도구를 빙자하여 실재했던 인물과 그 인물이 소속됐었던 왕조에 대한 신기루같은 이미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비판이 높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왕실소속 인물 중 독립운동 비슷한 것이라도 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런 비판과는 관계없이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공감'을 선사하는 모양이다. 그 '막대한 공감'의 내면에는 날조된 픽션도 잔잔한 미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족주의적 집단정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겠다. 


어느 평론가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픽션이지만 덕혜옹주는 당시 김연아 같은 아이돌이었고, 우리 민족은 우리의 마지막 황녀에게 영국국민들의 영국왕실에 대한 것과 같은 기억을...... " 


요즈음 잠꼬대같은 소리는 진보진영 평론가들이 더 자주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상반된 본질을 함유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문화현상이 대한민국 안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완용 평전은 이완용이 매국노인줄 일았는데 사실은 독립운동가 였다고 써 놓은 건 아니라고 하니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아직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조각페이지들과 평론들을 보니 시대상황과 사료들을 근거로 냉철하고도 객관적 시각에서 조명한 기록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객관적 시각과 실제 사료들에 충실하게 입각한 기록과 한국인의 집단기억 속에 박혀있는 이완용에 대한 이미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무엇이고 왜 그런 차이가 생겨났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독서의 묘미일 것이다.   


마침 다음 주 월요일인 29 일은 일본이 조선을 인수합병하는 사건이 일어난지 106 주년 되는 날이다. 


강점이나 강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인수합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항해 전쟁은 커녕 전투 한 차례 치른 적없이 서류에 서명해 나라를 넘겼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나라의 소유주인 황제라는 작자가 음독자살을 기도하기 위해 치사미달량의 비상을 다량의 물과 함께 들이켰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니 일본의 대한제국 접수를 인수합병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보다 5 년 전인 1905 년 11 월 17 일에는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일본제국 주한공사 사이에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제 2 차 한일협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한'은 대한제국의 '한'이다. 이 조약을 한국에서는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은 사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라고 볼 수 없다. 전쟁당사국과 중재국 사이에 벌어진 협상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왜 그런지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에 포츠머스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있다.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제 2 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기 두 달 전인 1905 년 9 월 5 일, 이 항구도시에 마련된 회담장에 일본 제국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가 나타났다. 


두 사람을 초대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테오도어 루스벨트 였다. 미국이 일본과 러시아 대표를 포츠머스로 초대한 이유는 막 전쟁을 끝낸 두 나라를 중재해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일 년 반 이상 전개된 이 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쓰시마 인근 바다에 수장 전멸시킴으로써 결국 승리했다. 일본군은 10 만 명 이상이 전사했고 15 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또한 7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제국의 외무대신은 이런 입장을 개진했다. 


"지난 10 년 간 일본은 극동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의미한다) 이 두 전쟁은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의 일관성없는 외교정책등 disorganization 에 기인한 바 크므로 일본이 이 나라를 지도-보호-감독할 수 있는 정치-행정-외교-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기 바란다. 이것은 주변강대국들로부터 일본의 영토와 주권안보 및 이익을 지키기위해 절대 필요한 조치다" 


(수 백 년 세월이 흐른 후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매우 유사한 20 세기 초와 21 세기 초 두 시대를 혼동할 수 있어서 여기 따로 기록한다. 당시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 이명복 정부였다. 이명박이 아니라 이명복이다. 고종의 아명이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은 러일강화조약의 제 1 조항으로 기록됐다.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이를 수락했고 미국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이 조약체결로 테오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일본제국 전권특명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과 직접협상하여 이 조약을 성사시켰다. 


문제는 한국 역사학계가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을 취사편집하거나 왜곡하여 어떻게든 대한제국의 운명과 관련하여 전권을 거머쥐고 있는 황제 고종의 책임을 면탈시키고자 그 책임을 여덟 명의 대한제국측 협상대표 중 협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대신 최종결정권을 황제에게 위임한 다섯 명에게 모조리 뒤집어 씌우는 엉터리 학설을 수립하여 지금까지 정설로 채택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항하여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은 물론 오대신상소와 그에 대한 고종의 비답, 일본측 기록자료 등 방대한 1 차 자료들을 정밀검토한 후 정설이 대부분 거짓말이었음을 폭로한 책이 '이완용 평전'이다. 


책의 저자는 친일부역자들을 옹호하는 사람이나 뉴라이트가 아니라, 기자정신에 투절한 해직기자 출신이다. 


조약발표 후 여론이 악화되자 고종은 자신의 어명을 따라 협상을 진행한 다섯 대신에게 "협의하여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고 이 책은 적고 있다. 


필자는 한국 역사학계의 '집단주의적 애국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즉 한국의 주류역사학계가 "고종이 을사조약에 반대했고 비준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도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며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 애국일지는 모르나 진실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는 아픈 지적도 하고 있다. 


이 책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제 2 차 한일협약' 5 년 후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7 개 주요조항 중 맨 앞의 4 개 조항이 일본황실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대한제국 구영토에서 군림하게 될 이씨왕실과 종친들의 예우에 관한 사항들이라는 것 을 볼 때 이 조약의 기본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실질적인 매국노는 고종 자신이며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은 사실상의 국가소유주 고종 '이명복 회장'의 법적대리인들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조선총독부 1 년 예산의 10 퍼센트 가량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이 당초 협약대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하는 1945 년까지 일본황실의 종실로 편제된 이왕실 (당시 이왕실은 일본황실의 일원이었다) 에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상식이나 막연한 집단정서에 휩쓸려 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진솔한 기록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선하고 합리적인 기억들을 함께 공유해 나가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반된 문화현상들 중 하나인 이완용 평전과 영화 '덕혜옹주'를 차례로 읽고 감상하면서 그 느낌의 차이를 비교하고 같은 한국인 (한국계) 끼리 의견을 나누어보는 건 아주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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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이 월산대군의 사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은 대한문 서쪽으로 밀려났지만 원래는 지금의 시청광장 일대를 포함하는 어마어마한 넓이의 대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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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르니아가 발급받은 최초의 대한민국 여권

발행인은 외무대신 박재순이다.


그런데......

박재순은 이른바 '을사오적' 중 한 명이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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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6-08-2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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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보다 몇 십배 더 황당한 건 민비지요. 일본 손에 죽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과대포장 되는 여자. 민비는 마리 앙뜨와네트 나 서태후 보다 훨씬 악질녀입니다. 청나라 조정이나 프랑스 조정을 조선과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국가 예산의 1/6을 혼자 쓴 여자입니다. 이런 여자는 조선 민중의 이름으로 재판에 회부해 사형 시켰어야 하는데 일본 놈들 손에 죽었으니.

당시 기록에도 보면 조선 민중들이 분노한건 일본 손에 민비가 죽었기 때문이지 민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석하거나 슬퍼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거에요. 이런 여자를 명성황후라고 떠받들고 있으니.참...

오늘은 생각 정리할 게 있는데 맘대로 안되 엉뚱하게 자유게시판에 댓글 달며 노닥거리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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