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시인이시며 시마을 시인 이신
안희선 시인님께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감상을 곁드린 유고작 한 편을 보내
오셨습니다
생전 고인의 문인으로서의 모습과 신실한 종교인의
내면을 바라보며 깊은 묵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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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감상했던 박영미 시인님의 시 한 편이
떠올라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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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가장 좋은
것 (하나님께 나 자신 드려) / 박영미 [캘거리 문협회원. 시인]
나에게서 가장 좋은 것으로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내게 있어 무엇이 가장 좋은지 도무지 몰랐습니다.
희미한
안개가 걷힌 어느 날 역경이라 생각했지만 맨발로 알 수 없는 가장 좋은 것을 찾아 나섰습니다.
숲
속을 지나 시냇물소리 들리는 골짜기에서 떨어진 별을 만났습니다.
나는 내앞에 왜 별이 떨어져
있었는지를 몰랐습니다.
당신의 손길이, 이미 나를 사랑하시던 당신의 손길이 별이 되어 가까이 와
있었음을 차마 몰랐습니다.
별이 떨어진 시냇가에 빈 마음으로 앉아 생각에 젖었습니다.
피 묻은
맨발이 껍질처럼 벗겨질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당신께
드리는 나의 몸, 나의 마음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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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생각>
일반적으로 시에 있어, 그 어떤 종교적 신앙이 介入될 때의 시적 전개는 (그것은 이른바 信仰詩의 형태로서) 삶의
진정성을 뒷받침해 주는 절대적 존재 (즉, 신앙의 대상)를 향한 접맥의 의지로 귀납되게 된다.
그러나 기실,
삶의 의미에 관한 본원적 갈구는 삶의 實相과 종교적 믿음 (영원에의 믿음)과의 조화 라는 점에서, 그 내면적 심상의 함축적인
전개는 결코 용이로운 일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박영미 시인의 '알 수 없는 가장 좋은 것' 역시, 삶의 본질을 종교적
믿음(또는 永遠性)과의 관계에서 천착하고는 있지만, 동원되는 상징과 비유의 이미지가 읽는 이의 가슴에 하나의 명징한 '意識'으로
전달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즉, 위선과 가식 그리고 증오와 불신이 팽배한 오늘날의 열악한 삶의 모습들에 시인의 깊은
의식이 임리하면서, 현실적 삶이 드리운 고뇌와 아픔을 종교적 사랑에의 열망과 希願으로 승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直面을 통해 인간적 삶의 한계를 단순한 '悲哀認識'이 아니라 영원성을 향한 하나의 '통로'로 인식하는,
즉 종교적 신앙을 바탕한 기도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내면적 심리의 세계와
'당신'으로 표상되는 주제의식의 교차가 잔잔한 긴장의 軸으로 작용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시가 현실의 반성과 새로운
앞날을 다짐하는 하나의 명백한 공간이 될 수 있다면, 방황하는 뭇 영혼들을 위한 고요한 안식처가 될 수 있으리라.
앞으로,
시인의 시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한 삶의 意識이 우리 앞에 찬연한 희망으로 제시될 것을 바라며..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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