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LA Times 가 '박근혜 사태'를 '클린턴 이메일'과 비교했다가 빈축을 산 적이 있다. 외신이 박근혜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얼토당토않은 비유였다.
우선 사태의 명칭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한국언론은 이번 사태를 최순실 게이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이건 잘못된 명칭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 사태'다. 사태의 주범은 최순실이 아니라 박근혜다. 적어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사건이 아니라 사태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저지른 범죄피해가 막대하고도 참담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형사소추가 가능한 위치로 끌어낸 후 감옥에 보낼 것인지 아니면 감호치료를 받게 할 것인지는 이 나라의 사법부가 판단할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영세교든 뭐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아울러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이 판결에 함께 반영될 것이다. 그가 저지른 가장 중요한 범죄혐의들 중 하나는 형법상 국가기밀누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형법 제 127 조 공무상 비밀누설죄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가 않다. 범법주체가 국가의 최고헌법기관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 범죄동기가 하도 괴기스러워 합리적으로 규명하기가 어려워서이다.
우리는 박근혜의 비정상적 정신세계를 모르고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다.
박근혜의 비정상적 정신세계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자료는 2007 년 윌리엄 스탠턴 주한미국 부대사가 로버트 마이클 게이츠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정세보고서다. 이 자료에서 보고서 작성자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자를 가리켜 '한국판 라스푸틴'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언론은 이 보고서를 이제서야 발견했다는 듯 보도를 하고 있지만, 상당수 한국국민들은 이 보고서가 워싱턴DC 에 보고되기 전부터 미국대사관 관리들보다 그 내용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대사관의 정보보고서 자체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경선캠프가 제공한 자료와 1976 년 최초로 작성된 대통령 보고서류를 토대로 내려진 결론이기 때문이다. 미국측에 교차정보를 제공한 이명박 경선캠프는 박근혜 문제에 관한 정보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밀한 정보를 어디론가부터 넘겨받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었던 이명박 경선캠프팀은 당시 그 정보를 필요한만큼만 써 먹었을 뿐 판도라의 상자를 공식적으로 적나라하게 개봉해 당시 경선후보였던 박근혜를 파멸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박정희 신화' 를 보수의 또 하나의 카드로 남겨놓으려는 보수세력 내부의 타협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 협상의 막후에는 당시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었던 뉴라이트 계열 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
'박근혜를 살려두자'는 보수엘리트 안의 이 타협이 그로부터 5 년 후, 그리고 결국 9 년 후 이 비극적 사태를 불러왔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제와서 보수진영 전체의 붕괴위험을 무릅쓰고 결정적인 기획정보들을 언론에 체계적으로 제공했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전혀 시급한 일이 아니지만, 보수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이 박근혜 정부를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원인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이명박 경선캠프가 소장하고 있던 박근혜 문제 정보는 박근혜 X 파일 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회자되던 국가정보원 박근혜 정보파일을 말할 것이다. 이 국가정보원 정보파일은 몇 년 전 부터 싸르니아가 두 세 차례 올린 글에서 소개한 대로 1976 년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파악한 수사자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초정보자료 작성에 동원된 기관은 예전에 알려졌던 두 기관, 즉 민정수석실과 중앙정보부 안전국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대통령 경호실 정보처였다.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이 직접 조사팀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이 경호실 조사과정에서 박근혜가 발작을 일으켜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은 두 손을 들고야 말았었다. 천신만고 끝에 경천동지할 '큰 영애의 비밀'을 밝혀낸 정보기관은 절망했다. 이 정보기관의 절망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에 그림자 역할을 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박근혜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국가, 그리고 그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의 연속성을 보존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적 절차에 따라 그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박근혜 정부를 신속하게 교체하는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정상이 아닌 사람에게 정상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싸르니아의 생각으로는 최순실 씨에게 부탁해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사퇴하도록 멘토링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일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 씨에게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데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멘토링에 따라 자진사퇴할 경우 기소하되 사면한다는 제안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의 보수우익 중에서도 극우로 분류해도 무방할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오늘 명언을 남겼다. "고 박정희 대통령을 보내드리자" 는 칼럼에서 그는 '우리 (보수)가 박근혜 문제를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대안을 마련할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의 환상을 방패삼아 박근혜 같은 사람을 18 대 대통령 후보로 내 세웠다'는 회한섞인 푸념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 사람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서인지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평소에 오만하고 고집스럽기 짝이없던 대표적인 보수논객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바른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보수진영에서도 엘리트들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판국에 박근혜의 행동을 두둔한답시고 헛소리를 하는 멍충이 같은 사람들이 보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면 오산 중 오산이다.
사실 자연인 박근혜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데는 그 자신의 책임이 반 이상 이겠지만, 그 다음으로 선친의 책임도 있고, 그의 문제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몰고 간 보수엘리트들의 책임도 있으며, 지난 대선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낸 유권자들의 책임도 있다. 이제와서 그를 마녀사냥하듯 인신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전부터 뻔히 알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는 듯이 그를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모욕적인 언사로 새삼스럽게 비난하는 것은 비겁하다.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당신이 사랑한다는 대한민국, 우리나라 정부의 연속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자진해서 하야해 주세요."
이 한 마디만 하면 충분하다.
이제 여덟 시간 후, 오늘 토요일 2016 년 10 월 29 일 오후 6 시 (한국시간) 청계광장에서부터 시작될,
언제 끝날 지 모를 이 항쟁은,
다른 무엇도 아닌, 국가공동체인 대한민국, 이 나라 정부의 정상회복과 연속성을 보위하기 위한 항쟁이다.
여기에는 진보나 보수 따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1948 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정부붕괴'라는 미증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정치적 당파성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이 광화문 광장에서 함께 부를 거의 유일한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애국가' 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