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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바라보였던 헌법재판소와 청와대
'싸르니아 사진 낙관'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 헌법재판소다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있는 종로구 재동에 미리 가보자.
동쪽으로는 현대사옥이 있는 계동,
서쪽으로는 싸르니아 생가가 있는 안국동,
남쪽으로는 운현궁이 있는 운니동,
북쪽으로는 한옥마을이 있는 가회동이 각각 재동을 둘러 싸고 있다.
지하철 3 호선 안국역에서 하차하여 2 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그 토요일 저녁 시청, 종각, 종로3가, 광화문 역 등에서 울려퍼졌던 것 처럼,
열차 기관사가 다음과 같은 안내방송을 할 것이므로 모르고 지나칠 염려는 없다.
"이번에 정차할 역은 촛불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안국(安國), 안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입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실 분들은 부디 몸조심하시고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2010 년 10 월
모교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헌법재판소를 지나가다 찍은 사진
재동 옆길 계동
삼청동에서 재동 방면으로 접근하는 길
언젠가 '재동' 이름 유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재동의 이름은 계유정난에서 비롯됐다.
계유년에 일어난 어려움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닭의 해 였는데, 여기서 닭을 의미하는 한자는 '계'가 아니라 '유'다.
계유정난에 대해서는 해석과 평가가 분분하다.
첫째는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벌인 반란사건이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세종대왕 (또는 이막동 선생) 고명대신들이 어린 왕을 둘러싸고 벌이는 국정농단을 중단시키기 위해 왕실종친들과 비주류 사대부들이 의기투합하여 국정농단자들을 몰아내고 왕권을 재확립한 유사친위쿠데타라는 해석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친의 대표는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이고,
비주류 사대부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권람 등과, 한명회를 형님으로 모셨던 소장 무관들을 말한다.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89 년 까지 창덕여자고등학교가 그 자리에 있었고,
조선말에는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 년에는 어린 임금 단종이 머물고 있던 경혜공주 사저의 일부였는데,
그 날 밤, 어린 임금은 자기 누나이기도 한 공주의 사저 뒷마당에서 철퇴에 맞거나 장검에 찔려 죽어나가는 대신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밤새도록 들으며 공포에 질려 있어야 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영의정 이름은 황보인 이라는 사람이다.
병신난리가 일어났을 때 국무총리 이름은 황교안 이라는 사람이다.
같은 황씨 아저씨가 아니라, 하나는 황보씨고 다른 하나는 황씨다.
이름의 음운만 서로 비슷할 뿐 이름도 다르고 성도 다르다.
재동 이름 유래 이야기하다가 이야기가 또 복잡해지고 딴 데로 샜는데,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결론을 맺자면,
재동은
그 날 죽임을 당한 시체들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재(ash)를 덮은데서 유래한 동네 이름이다.
한마디로 재동은 터가 드센 동네다.
헌법재판소로 가는 길은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재동길로 진입하는 길 하나 뿐이다.
남의 집 담장을 넘지 않는 이상 남북 두 방향에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재동에서 동쪽으로 한 블럭 위 계동 초입에 2 만 원 대에 한정식을 즐길 수 있는 신내리 북촌점과 응암 감자탕집이 있다.
안동교회 옆 윤보선 고택
헌법재판소 서북쪽 100 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카페로 변신한 싸르니아 생가
헌법재판소 서남쪽 100 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무대에서 열창을 하고 있는 어느 중년 아주머니
아무래도 젊었을 때 가수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