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저자들이 예수탄생 이야기를 복음서의 서론으로 기록한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회상하면서, 예수는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당시의 이분법적 가치관, 윤리관, 신관을 개혁하여 통합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포한 것을 경축하려는 것이다. 예수 당시 98%의 민중을 통제하고 착취하던 성전신학과 제국신학의 핵심은 천당-지옥, 축복-징벌, 선택받은 사람-버림받은 사람, 내부인-외부인, 여자-남자 등으로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구원론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분법적 신학을 거부하고, 하늘(내세)과 땅(현세)을 분리하기 보다 이 땅 위에 오직 하나의 세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또한 예수는 영생(永生)이란 죽음 후의 영원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깨달음이 영생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성속(聖俗)의 경계 넘어 모든 생명의 선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으며, 세속적인 일상생활은 성스럽다고 선포했다. 따라서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성탄절은 예수의 정신을 따라 말과 삶이 분리된 이분법적인 믿음과 내세와 현세를 분리하는 형이상학적인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과학과 종교의 분리,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의 분리, 몸과 영의 분리, 각 개체들 사이의 분리, 개체들과 전체의 분리 등 모든 이분법적 분리들을 개혁하는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통합 비전을 살아내는 것이다.
성탄절은 기독교교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절기들 중에 하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들과 함께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은 기독교인의 예수상을 형성하는데 기본적인 요소가 되어왔다. 물론 성서 전체의 저자들이 그랬듯이 마태, 누가, 요한이 성탄절 이야기들을 기록한 목적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을 문자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대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시적이고 신화적인 창작품이다. 이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동정녀 잉태, 이상한 별, 동방박사들, 목자들, 그리고 베들레헴 말구유의 출생은 특별한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증거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수단들이다. 특히 동정녀 잉태와 특별한 별은 당시의 고대사회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들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원초적인 복음서 저자들의 목적은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 즉 인간 예수의 정신을 통해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영적 체험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을 예수탄생 이야기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은 자신의 저서 ‘역사적 예수’에서 예수의 목회와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태초에 퍼포먼스(performance)가 있었다. 말(word)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행동(action)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 둘 모두가 서로에게 영원히 자국을 남기며 있었다.” 오늘 유럽과 호주와 북미의 주류 기독교신학을 이끌어가는 역사적 예수운동에서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도미닉 크로산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갈릴리 저지대 마을에 들어설 때, 그는 아직 낯선 사람이다. 오랜 세월 겨우 끼니만 이어갈 수밖에 없어, 가난과 극빈 사이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농부들은 냉정하고 무뚝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남루하게 보이지만 그의 눈에는 비굴함이 없으며, 그의 목소리는 애처롭지 않으며, 그는 발을 질질 끌지도 않는다. 그가 하느님의 통치에 관해 말하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호기심에 끌려 그의 말을 듣는다. 그들 모두는 통치와 권력, 왕국과 제국에 관해 익숙하지만,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세금과 빚, 영양 실조와 질병, 2%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억압과 부의 축척은 악마와 같다는 관점에서 알고 있을 따름이다.”
21세기의 크로산은 “예수는 세상에 왔다. 세상은 그를 통해 변해갔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그를 잘 몰랐다” 고 말하는 반면에, 1세기의 요한은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요한 복음서 1:10-13) 고 말했다. 현대인 크로산과 고대인 요한 두 사람은 깊은 상상력을 가지고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기록했다. 요한은 우주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예수를 그리고 크로산은 세속적인 일상생활의 예수를 묘사했다. 현대과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없이 삼층 세계의 우주관을 갖고 있는 고대인 요한은 꿈 속에서 또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에서 내면의 하느님의 음성 또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2000년 전,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적 체험을 당시의 보편적인 삼층천의 우주관에 따라 표현했다. 따라서 대단히 은유적이고 시적(詩的)이고 신화적이다.
물론 요한의 성탄절 이야기에서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 즉 갈릴리 예수의 모습은 문자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예수는 항상 신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신학을 잘 드러낸 것이다. 본문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들은 예수를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믿어야 한다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정통 또는 바른 믿음 이란 말들과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의 교리적인 말들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예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예수는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유대인 촌부였다.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는 제사장이나 신부나 목사 같은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물론 예수는 전문적인 신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예수는 시골에서 농부들과 어부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현자(sage)였다.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지혜를 다른 사람들과 허물없이 정직하게 나누는 현자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다. 현자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에는 말만 무성했던 것이 아니며, 깨달음없는 행동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생각하고, 깨닫고, 이것을 말하고, 또한 말한대로 몸소 살았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 모두는 인류 역사 속에 영원히 자취를 남겼다. 다시 말해, 예수의 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속에서 몸소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1900년 전에 기록된 신화적인 요한복음서를 자신들의 새로운 이야기로 재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요한의 이야기를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로 재구성함으로써 요한의 패러다임을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시대에 보편적이던 삼층 세계관이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과 기도 속에 드러나고 있다. 중력의 법칙과 우주진화의 법칙을 무시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아직도 현대인들의 신앙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을 내려 놓기가 아깝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아니면 잘 모르겠으니 지금까지 해 오던대로 무작정 믿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21세기의 종교적 신앙은 현대과학을 이해하고, 과학과 모순되지 않고, 과학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물리학과 천체학에 따르면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언젠가 폭발해서 없어진다. 이 불확실한 우주가 영원한 인류의 집이고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숨쉬며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오랜 인류역사가 흘러 오는 동안에 다양한 사회적-문화적-종교적 발전 속에서 인간은 과거의 권위주의적 전통과 관습을 따르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겨왔다. 물론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적 존재로서 과거의 전통과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과거로부터 우리의 인간됨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모든 문화권에서 과거를 존중하고 그것을 명예롭게 그리고 소중하게 다음 세대로 전수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는 단지 과거에 의해 창조되고 성장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현재 속에 살고 있다. 현재없이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현재인 좋은 과거를 물려주어야 한다. 또한 후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도록 도전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가 미래에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종교적 문제들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와 후손들의 더 좋은 세상은 보장할 수 없다.
오늘날 인간의 삶의 지배적인 유형은 종교적 우월주의 내지는 사상적인 배타주의로 인해서 너와 나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서로 다른 집단들을 의심하고 원한을 품고, 정의롭게 질서 잡힌 공동체와 사회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기 보다 서로 적으로 규정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더욱이 과학이 밝히는 기후변화를 무시하고, 생태계를 경시하여 인간의 단기적 쾌락과 이익을 위해 자연환경을 착취하며 파괴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이런 유형은 역사적 예수가 그랬듯이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우리의 정치-경제-문화-종교-과학-기술의 건강한 관계를 지속해 갈 수도 없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 즉 새로운 현재에 살고 있으며, 이 현재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게 삶을 규정하고 질서 잡았던 과거의 패러다임이 현재에는 인류와 미래 전체를 파멸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낡고 진부한 이분법적 삶과 행동, 믿음, 희망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간 생물종(種) 자체가 자멸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며, 첫째로, 종교와 인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둘째로, 내세를 꿈꾸며 현세를 무시함으로써 생긴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통합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믿어야 정통이고 바른 믿음이라는 낡은 신앙은 로마제국의 치하와 고대 유대교의 전통에서는 가능했는지 몰라도,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 역사적 예수는 입술로 관념적인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말로 가르친 것을 몸과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예수가 죽은 후, 생존과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요한복음서 원본(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필사하여 사본들을 만든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교리화 내지는 이론적인 신학으로 재구성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사본을 문자적인 말로 끝내버리면 요한이 욕을 먹는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원초적인 요한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로 전환해서 오늘 어떻게 사는 것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인지를 탐구해야 한다. 요한도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것을 원했으며, 이론과 교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의 많은 현자들과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단지 이론과 학설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과 갈등 속에서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들의 핵심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이었다. 현자 예수는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예수도 우리처럼 때로 두려움도 가지고, 유혹도 받고, 화도 내고,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셨다. 예수는 이렇게 세속적인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살면서 내면의 하느님을 새롭게 깨달아 알았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나는 누구이고,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지에 대해 새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평범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분법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180도로 뒤집어 엎은 개혁가였다.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카우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판단하는 규범(norm)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죄와 구원의 공식, 임박한 내세 등의 어떠한 초자연적인 권위나 초인간적인 능력에 근거할 필요가 없게 된다. . . . . 개인과 가정과 교회는 만약 예수를 모델로 하여 삶을 결정짓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결정의 주체는 우리가 될 것이고, 결정을 이뤄나가기 위해 걸음을 대딛거나 실패하는 것도 우리가 될 것이다. . . 우리는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하느님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종교와 문화적 다원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적절한 개방성과 책임성을 갖고 살 수 있다. 만약 오늘날 전 지구적 컨텍스트가 보여주는 극도의 다원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데 있어 필수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축하하는 성탄절은 이분법적 신학을 거부하는 진보적인 신앙의 여정에 다시 한 번 큰 걸음을 앞으로 내 딛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종착지에 도달한 완성품이 아니라, 영원히 미완성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숙해져 가는 여정에 있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체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진보적인 심층의 삶의 공동체 라는 전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가 요청하는 우주적인 통합의 신앙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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