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 휴심정에 소개된 길희성 교수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 길 교수는 국민들의 촛불집회는 한국의 미래의 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울러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못본체 할 수 없는 이웃 미국의 대선에 대해서도 신선한 해석을 내렸습니다. 저는 길 교수의 글을 통해 한반도와 북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안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길 교수의 글은 보수-진보, 종교인-무종교인, 유신론자-무신론자, 기독교인-비기독교인의 경계 넘어 양심과 상식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고나서 개인적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조국의 앞날을 위해 희생적으로 용감하게 촛불 집회를 일으키는 에드몬튼 교민들과 조국의 국민들에게 찬사와 감사를 보냅니다. 길 교수의 글을 함께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종교학자인 길 교수는 서울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고, 그의 대표적인 서적으로 ‘보살 예수: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현암사)이 있습니다. 지금은 심도학사 원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무수한 차이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정의의 힘: 종교-권력-언론-재벌의 침묵의 카르텔 깬 희망>
어느 해이건 다사다난하지 않은 때가 없지만 지난해에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는 일이 전국을 강타했다.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 대선에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미국인들 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남북한 관계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통일의 꿈은 점점 더 멀어 만 간다.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젊은이들은 ‘헬 조선’을 외치면서 나라를 아예 떠나고 싶다고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시작된 비극은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고, 세계는 언제 어디서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호하고 있는 신고립주의와 극우 민족주의 세력 역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면서 세계 일등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만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신고립주의가 문제의 해결은 못된다. 더군다나 지금껏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렸던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가 이제 와서 태도를 돌변해서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로 돌아선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이래저래 강대국에 의해 휘둘리는 약소국들만 당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인류역사의 필연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국내외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미국 대선 패배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했다는 말, “내일도 태양은 뜰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겸손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이 세계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그의 실망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상상해 본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잊고 살기 쉬운 깊은 뜻이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최 아무개 덕이라는 역설:
최근에 우리는 전국적인 촛불 시위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값진 수확도 있어서, 분노 가운데서도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 때문에 구겨진 나라의 체면과 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온 국민의 마음의 상처가 수백만이 들어 올린 촛불 때문에 그나마 보상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라가 안개 정국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헌재의 판결이 앞으로 어떻게 내려지든, 우리는 나라의 장래에 대해 ‘희망’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안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이 최 아무개 덕택이라는 말하겠는가? 문자 그대로 여야, 진보 보수, 남녀노소, 신분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오랜 진리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촛불 집회가 일종의 ‘종교적 행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종교적 경험’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근대사회로 오면서 나라의 국교(state religion)라는 것이 사라지고 종교가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고 다원화되면서, 사회가 개별종교들을 초월해서 구성원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른바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것이 자연히 대안으로 형성되게 되었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현대 종교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의 차이를 넘어 미국인들로 하여금 어떤 공통의 미국적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시각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한국은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유교라는 종교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비록 ‘시민종교’라고 불릴만한 것이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항상 존재해오다가, 이번 촛불시위를 계기로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더럽다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게 정치:
나는 이를 계기로 해서 그동안 시민종교, 그리고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창하는 이른바 이성종교(Vernuftreligion) -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신관과 계시 신앙을 대신해서 인간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와 도덕성을 모든 종교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 에 대한 종래의 이해가 달라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성종교나 시민종교가 개별종교들(실정종교, ‘자연법’과 구별되는 ‘실정법’이라는 개념이 있듯이)이 지니고 있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나 감동이 없는 미지근한 종교, 지나치게 합리화된 싱거운 종교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시민종교도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도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백만이 외치는 함성에는 종교 특유의 성스러움이 느껴졌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강한 마력과 흡인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뿐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무수한 차이들을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에는 분명히 어떤 초월적인 종교적 요소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십만 명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개인이 지니고 있는 이런저런 관심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고 개인들이 겪는 천차만별의 운명 또한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다는 것, 심지어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에 사는 나의 가까운 친구는 먼 길을 마다 않고 5번이나 집회에 참여했다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특히 요즘 학생들과 청년들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 같은 것이 없고 연예인들을 둘러싼 루머나 잡담에나 관심이 있고 취직과 스펙 쌓는 일에만 열심이라는 비판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일등 국민’에 ‘삼등 정치’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지만,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근거 없는 자기비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미국 국민의 정치수준이 우리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 대해 너무 자조적이거나 비판적일 필요가 없다. 정치가 ‘더럽다’ 해도 관심을 접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치란 좋게 말해.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고 비판정신이 마비된 종교: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지 우리 정치계만이 문제가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우선 최태민 같은 사람이 사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풍토를 조성한 우리나라 종교계 일반의 문제가 있고, 오래전부터 이런 엄청난 비리를 알고 있었을 것 같은 데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부와 권력을 탐해 온 우리나라 권력층, 언론계, 폴리페서들, 그리고 정보력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우리나라 재벌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역시 우리나라 종교계와 신앙풍토에 무게를 두고 싶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고 도덕적 비판정신이 마비된 풍토에 있다. 특히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관심이 따로 놀면서 도덕적 비판을 감당할 수 없는 한심한 종교집단들이 독버섯처럼 마구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종교에 놀아나고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새삼 종교란 것이 정말 무서운 것, 위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하기야 유독 우리 종교계만 그렇겠냐는 생각도 든다. 지난번 미국 대선 때 트럼프 같은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우기던 구역질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런데 더 한심한 사실은, 당시 공화당 후보 12명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 같이 누가 보아도 복음주의자라 불릴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서로 복음주의자라고 우기는 꼴이 가관이었다. 내가 무슨 진실한 신자라고 착각해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뻔뻔한 짓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런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이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인들의 낮은 정치의식에 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샌더스가 말하는 가난한 자에게 깃든 영성: 그러나 이와 매우 대조적인 장면도 지난 번 미국 대선에 있었다. 민주당 후보 지명을 얻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경합을 벌리다가 고배를 마신 샌더스 상원의원의 경우다. 아마도 선거운동 기간이 한 2주 정도만 더 있었더라면 역전 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패배는 아쉬운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CNN 방송이 타운 홀 미팅 형식으로 주최한 후보 토론회를 보게 되었는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샌더스에게 당신의 종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했다. 마음속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던 나는 순간 약간 놀랐다. 그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 질문이 결코 샌더스에게 유리하거나 우호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를 감동시키에 충분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말하기를 “나는 정말 깊이 종교적인 사람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랐고 한 층 더 긴장해서 그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나의 종교, 나의 영성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어떤 소녀가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거나, 어느 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약을 못 사먹는다면 나의 종교, 나의 영성은 바로 그런 데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유대교 영성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비록 대권후보자로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미국사회 일반인들의 의식을 바꿀만한 돌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앞으로 미국사회의 정치판도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유대교 영성의 특징과 장점은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윤리적 유일신 신앙‘(eth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나는 샌더스 상원의원의 모습에서 이런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예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대교는 신학이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종교이고, 우리가 얼마나 율법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가에 있다. 경건한 유태인이었던 예수 자신도 신학이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율법의 참 정신에 따라 사는 삶에 있었다. “누구든 하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다”라는 그의 말 그대로다. 정의의 예언자라 불리는 아모스는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고 외쳤다. 구약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고, 정의의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다. 정의론의 저자로 유명한 철학자 존 롤스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말하기를, “만약 정의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정의는 인생의 궁극적 가치, 즉 지고선이라는 말이다. 정의는 도덕, 정치, 종교 모두가 추구해야만 하는 궁극적 가치이다. 정의를 외면하는 정치와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런 정치, 그런 종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