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를 소개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기독교인으로써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내 자신이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 희망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인가 를 묻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기독교인들은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그리고 주일예배와 각종 모임에서 기도합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하느님에게 무엇인가 주십사고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도와주십시오, 내가 필요한 것이 이런저런 것들이니 이것들을 주십시오 등등의 주문형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기도의 의미와 목적은, 하느님은 기도제목들을 해결해 주는 대상이기 보다, 기도자가 자신의 기도제목들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보다, 내가 다른 사람의 희망과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병이 낳기 원하는 기도를 하면, 의사를 찾아가고, 건강한 식생활과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원하는 기도를 하면, 자녀들에게 먼저 삶의 모범을 보이고 정직과 양심과 정의가 무엇인지 독려해야 합니다. 건강문제, 자녀문제, 가정문제, 교회문제, 세상문제를 하느님에게 떠맡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기도제목의 실천자가 되는 결단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무릎꿇고 두 손 모아 하늘을 쳐다보고 하느님에게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기도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늘을 향해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이 얼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는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타자로 삼고 무엇인가 요청하는 기도 대신에 자신에게 도전하고 내면으로부터 느끼고 깨닫는 하느님이 나의 손과 발과 입이 되기를 결단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도 않고 모든 것들을 하느님에게 떠맡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살겠다는 결단이고 약속입니다. 예수는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멋들어진 말장난의 기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위선자라고 분노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야단 맞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키도록 요청하기 보다, 기도하는 내가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내일을 모릅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기도는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시간낭비일뿐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의 미래와 희망을 위해 기도한다면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희망과 기쁨이 되는 구체적인 일들을 실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