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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사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어디를 갔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때가 많았다.
이따금 동행이 찍어 준 사진을 발견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 그때 여기갔었지 하는 깨달음과 함께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던 세밀한 여행기억의 조각들이 나에게 되돌아오곤 하는 경험을 하곤 했다.
몇 차례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사진찍기란 결코 시간낭비나 촌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귀중한 기록행위라는 것을 알게됐다.
2010 년 어느 여름 날 이름모를 거리의 느티나무 아래서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
난생 처음 내 돈 주고 부속장비 포함해서 천 달러 쯤 하는 카메라를 구입했다.
이제는 고물이 된 그 카메라를 지금도 쓰고 있다.
더 좋은 기능이 있는 새 카메라를 장만하라는 권유도 받곤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이상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의 기능이 갈수록 좋아져 DSLR을 사용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카메라를 교체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흔적이 아니었다면 카페 라보데기타의 저 평범하게 생긴 간판을 프레임에 담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때로 여행은 나를 '독서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올드 아바나에 가기 전, 어렸을 때 두 페이지 쯤 읽다 내던져버린 '노인과 바다'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저 사진을 보면 앙코르왓에 다녀 온지 4 년 5 개월이 지난 지금도 당시 받았던 뭉클한 느낌이 방금 전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침수평원지대에서 최강의 문명과 최강의 자연이 벌이는 진검승부 !
당시 나는 "엄청난 노동력과 과학적 공법이 동원된 문명의 결사적인 도전에 일단 굴복했던 자연이,
이번에는 강력한 생장복원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문명의 인위적 건조물들을 파괴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말을 했었다.
사진들이 없었다면 당시 받았던 느낌을 표현했던 이 말을,
4 년 5 개월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생생하게 구체적인 문장으로 재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들어가면 사진의 차원이 달라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담겨있는 명품사진이라도 사람의 표정이 들어가 있는 사진을 따라잡지 못한다.
싸르니아의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은 사람과의 교감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이다.
글로 쓴 기록과는 또 다른 의미와 기능으로 여행의 귀중한 유산을 남겨주는 역할을 한다.
하늘이 아름답게 보일 때 여행의 기쁨은 두 배
싸르니아는 하늘이 이쁘면 곧바로 그 하늘풍경을 가져온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과 파란하늘이 어우러진 모습에 강렬한 매력을 느낀다.
CPL 필터를 쓰면 하늘이 더 이쁘게 나온다는 말을 듣고 사서 사용한 적도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자유
싸르니아는 대도시를 좋아한다. 도시가 인간소외를 낳는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도시는 문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돈된 환경을 선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도시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장 귀중한 선물은 바로 '자유'다.
싸르니아는 지금까지 도시를 떠나 산 적이 없다.
심지어 군생활조차 대도시 (진해-대구-부산)에서 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도시 중 가장 작은 도시가 온타리오주의 Sarnia 라는 인구 10 만 명 미만의 소도시였다.
약 9 개월 정도 살았는데 이 곳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첫째 갈 곳이 별로 없고, 둘째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자유의 필요조건이 되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sarnia (싸르니아)가 현재 사용하는 닉은 바로 이 도시 이름 Sarnia 에서 따 온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면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종종 여행지에 가서 실망했다는 말을 한다.
실망하는 이유는 아마도 여행지의 image를 제멋대로 미리 규정해 놓고,
현지에 가서는 자기가 규정해 놓은 image와 일치하지 않는 모습에 인지부조화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남이 써 놓은 여행기를 읽는 것은 도움도 되는 반면 부작용도 많다.
남의 여행기나 여행사 광고만 믿고 여행을 가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골목에서 경험하는 보석같은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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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어도 얼굴이 붓지 않았던 괜찮은 라면
대신 줄을 서야 한다
여행의 시작 에드먼튼 국제공항
벤치의자에 길게 누워 JTBC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중
올해 봄 여행은 부산으로 간다.
동백섬 근처 바다가 바라보이는, 작지만 깔끔한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여행을 앞 둔 느낌이 예년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분쟁지역에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어수선하다. 심상치 않은 한국 정세 때문이다.
대통령측이 민주주의 기본질서와 법치를 모조리 부인하고
한 줌도 안되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유혈백색테러를 선동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역사적 격동기가 겹치는 시기에 한국에 가는만큼,
여행지 부산보다는 서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