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박근혜님이 탄핵되었으니, 사회도 안정되고 우리도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상화에서 최성철 목사의 칼럼이나 여기 자유게시판의 글들에 대해서 아주 거칠게 몇마디 할 까 합니다. 우선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최성철 목사의 신학적 열정은 캘거리의 교역자 협의회나 보수 교회 목회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성철 목사는 이들보다 아주 고차원적인 분이며 비교불가한 분입니다. 일전에 캘거리 만민교회와 관련하여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씨엔드림에 광고 보이코트 하는 권력의 형태를 보인 것이 캘거리 교역자 협의회입니다. 제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만민교회를 보고 "이단이 아닐 이유"의 글을 올렸을 때 몇 분들이 분개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이른바 신생 종파나 신학적 변증(호교)의 준비가 되지 않은 종교인들이나 단체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쉽고 큰 용기를 "전혀" 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최성철 목사의 신학을 보면 만민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단중의 이단일터인데 왜 보수교회 교역자들이 전혀 "신학적"반응이나 대응을 보이지 않는지 이상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분들은 최성철 목사의 신학을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교회라는 벽에 숨어 그를 비판할지는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신학적 토론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어쩌면 비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역자가 교회에 교역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른바 이단이 나타났을 때 교회를 보호할 의무를 이분들은 유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문제를 보수적인 알버타 교역자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성찰해 보시길 바랍니다. 최성철 목사의 이단성을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만민교회를 이단이라고 설교에서라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볼 때, 만민교회는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하구요. 최성철 목사는 더욱 이단이 아닌 본인의 신학적 앎을 정직하게 발언하는 용기 있는 분입니다.
각설하고, 제가 최성철 목사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을 몇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최성철 목사가 유신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하느님을 운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넌센스입니다. 이분이 주장하는 내면/외면의 주장은 소위말해서 자유주의 신학의 극단으로 가지 못한 어정쩡한 보수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진술은 매우 진보적인 것 같지만, 여전히 신의 이름을 상정하거나 신의 상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보수적인 삼층 세계관의 신학을 별로 진척 시키지 못했습니다. 내면/외면의 신학적 이원론은 과학에서 비판하는 신학적 담론을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그의 종교적 "극소주의"(minimalism)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적 사실에 배치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다보니 그에게는 종교적 진술이 거의 없습니다. 스퐁처럼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어설프게 결합다 보니, 고작 우주와 지구의 진화를 묵상한다 정도일 뿐입니다. 이런 종교적 극소주의는 종교와 거리가 멀며 집에서 혼자 외롭게 명상하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자기 정당화의 진술에 불과합니다.
둘재, 최성철 목사의 신학에는 성서와 기존 신학적 성찰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부재합니다. 그의 "신없는 종교는 가능하다"는 진술은 새롭지도 않습니다. 이미 Unitarian Church에서는 무신론적 교회를 지난 20세기 동안 형성해 왔습니다. 근본불교를 위시한 힌두 사상에서 신을 상정하지 않는 종교도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이나 종교현상학 등에서 종교를 이해할 때, 방법론적 불가지론 (methodological agnosticism) 또는 방법론적 무신론 (methodological atheism)을 제시해서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정이나 종교적 진술을 배제하고 종교를 연구합니다. 이것은 인문 사회과학의 종교연구의 ABC입니다. 신의 죽음의 신학 또는 신의 부재의 신학은 이미 1960년대 정리가 다된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New Atheism 등은 그 당시의 신학적 진술보다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종교학계의 진술입니다. 앎은 역사적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최성철 목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신학적 담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진술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부 대중적 학자들의 글에 의지하다보니 분석적인 글 보다는 선언적인 글들이 그의 글의 대부분을 이룹니다. 바로 이것이 최성철 목사가 신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에게는 지난 1700년에 걸친 신학적 담론에 대한 이해가 매우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글들이 대부분 선언적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셋째, 그가 진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화론을 모르면 마치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으로 낙인찍지만, 그의 진화론 이해는 여러가지 이해가 혼합되어 본인 스스로 진화 이론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Loyal Rue처럼, 그는 진화론을 자신의 신학에 맞는 "목적론적"(teleological) 이해로 받아들입니다. 자연과학의 이론으로서의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을 혼돈하다 보니 그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과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른바 별로 진보적인지 않은 신학사상, 즉 "이상화된 관념" (idealized vision)과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을 억지로 맞춘 목적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학적 진술안에 진화를 이야기하려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 문화로서의 진화론에 대한 정치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해석이 따라야 됩니다. 우주의 역사가 몇 억년이고 지구의 나이가 몇 억년이며, 생물이 진화되었다는 동어반복식의 내용을 말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종교를 비판하는데 열의를 다하다 보니, 그의 신학은 정작 본인의 체계적인 신학화의 실패는 물론 사람들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앞으로 그의 신학과 진화론의 결혼이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진화론 자체의 정확한 이해와 그 이론의 신학적 적용에 대한 방법론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학에 훈련이 되지 않은 lay people(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에게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은 항상 진화론만 성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수천년 동안 여러 종교에서 물어온 인간의 고통, 삶, 죽음, 삶의 유한성과 의미, 생존 등의 질문에 답하는 신학이 되어야 합니다. 진화론도 여기에 답할 수 있다면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이스의 비극의 작가들이 질문했던 것, 쉐익스피어가 질문했던 것,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그리고 타고르와 간디가 물었던 것, 까뮈나 샤르트르, 카프카의 실존적 질문들을 답할 수 있는 신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최성철 목사처럼 이른바 보수 근본주의와 싸움만 하는 신학은 이들과 싸워서 승리를 거둘지 모르지만, 정작 자기 신학의 체계적 반성은 결여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 존 셀비 스퐁입니다. 그가 평생 근본주의와 싸워서 얻은 것은 다름 아니라 근본주의 신학의 단결을 초래한 반면에 그가 속한 에피스코팔 교회의 사망선고를 앞당기는 공헌을 지대하게 한 것일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위대한 것은 그는 적어도 인간의 삶과 죽음, 유한과 무의미의 문제를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죄의 문제를 무가치하지 않다고 본 것이 아니라 실존의 소외와 비존재의 위협이라는 면에서 철학적으로 승화했기 때문입니다. 스퐁처럼 근본주의와 싸워서 승리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쉬운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polemic arguments는 결코 승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진영의 추종자는 생길 수 있습니다. 저의 제언은 이제 삼층세계관이니 하는 동어반복적 진술이 아닌 최성철 목사의 본인의 신학적 작업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1960년대의 신학자들의 고민과 틸리히 같은 신학적 거성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최성철 목사의 비판과 비평의 대상과 1차 독자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바로 진보진영의 교역자와 신학자들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성철 목사의 칼럼의 독자는 보수 근본주의자가 아닌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학적 의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이것을 듣고 싶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결합은 새로운 신화만들기 작업입니다.
두손모아 합장...아프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