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픈 이야기를 다룬 변영주 감독의 연작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도 기억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 인식 과정에서 정대협의 활동과 수요집회의 역할이 작지 않았겠지만, 연작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의 울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의 역할론 중 '참여적 기여'의 아주 좋은 예였을 거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선
▲ <어폴로지> 공식 포스터감독 티파니 슝(캐나다), 제작 캐나다영상위원회, 2017년 3월 16일 국내 개봉.ⓒ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
소녀상 건립과 철거의 논란, '12.28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진실 논란이 뜨거운 시점 또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다. 한국, 일본,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의 이야기를 담은 캐나다 감독 '티파니 슝'의 <어폴로지> 지난 16일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을 에이케엔터테인먼트'(대표 김지용)가 수입하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영화사 '그램'과 공동 배급에 나섰다.
운인지 사회적 분위기인지 모르겠지만 CGV아트하우스 및 CGV 단독으로 50개 관을 잡았다고 한다. 단독의 의미는 영화가 방송 프로그램 편성처럼 시간대별로 퐁당퐁당 편성되는 상영환경에서 한 개관에서 하루 3번의 기본 상영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지난주 영화를 보고 나서 이건 기사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직도 피해자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더욱이 이 다큐멘터리가 캐나다 감독 작품이어서 내가 평소에 관심 가졌던 '제3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어찌 보면 제3자의 시선이 안타까움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이슈화되기까지
▲ 윤정옥 정대협 전 대표198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부곽시킨 여성운동가ⓒ 정대협
조사 결과를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세미나에서 보고했으며 관련 연구위원회도 결성했다. 그리고 급기야 1992년 정대협까지 결성하는 이바지를 했다. 정대협과 같은 상설 단체의 탄생과 수요집회와 같은 지속적인 활동으로 해방 이후 40년 이상 간과되어 온 역사적 사실과 청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사진 속의 왼쪽에 젊은 사람이 변영주 감독이다.ⓒ 변영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확산 과정 중에 변영주 감독이 만든 연작 다큐멘터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변 감독은 1995년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1997년 <낮은 목소리2> 1999년 <숨결-낮은 목소리3>. 총 3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공개했다. 한 편도 아닌 세 편을 2, 3년 간격으로 공개한 변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한 철학을 가진 여성운동가였던 거다. 운동이란 역사적 사실과 문제점을 알려 내고 문제의식을 공감시켜야 하는 과정이기에 오프라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집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그녀의 작품은 정대협의 활동 및 수요집회와 더불어 세상에 연속적으로 공개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변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공명을 통한 확산의 역할을 했다.
또한 <낮은 목소리>의 다큐멘터리 기록은 연로하신 할머니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한 분씩 한 분씩 유명을 달리하는 현실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사회적 망각에 대한 방어자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점점 고조되었고 다큐멘터리로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권효 감독의 <그리고 싶은 것>(2013)이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에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만행과 인권말살을 보여주는 극영화로 조정래 감독의 <귀향>이 2016년 개봉을 했었다. 최근엔 이나정 감독의 <눈길>이라는 극영화가 지난 1일 개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는 비단 우리 민족만의 아픈 상처는 아니었다.
▲ <낮은 목소리2> <낮은 목소리3-숨결>변영주 감독의 위안부에 대한 기록은 3편의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어졌다.ⓒ 변영주
캐나다 다큐멘터리 <어폴로지>의 새로운 시선
티파니 슝 감독의 <어폴로지>는 바로 한국, 중국, 필리핀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다큐멘터리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이시면서 위안부 문제의 청산을 위해서 국내로 국외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여성인권운동가 길원옥 할머니, 전후 결혼을 하여 사랑스러운 아들과 손주까지 두었지만, 그동안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지 못해 괴로워하시는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아델라' 할머니,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아이를 가졌지만 낳자마자 버려야만 했던 중국 위안부 피해자 '차오'할머니가 바로 그들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유형의 작품에서 관행적으로 나올법한 과거 역사 자료화면 하나 집어넣지 않고 세 할머니의 '지금'을 담고 있다.
▲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2014년 3월 중국 심양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 해외 여성 토론회'에서 연설 중이신 모습.ⓒ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
길원옥 할머니는 젊은 운동가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몸을 불사르고 계신다. 수요집회뿐만 아니라 일본 항의 방문을 가고, 중국에서 개최된 남북 여성단체 공동 '정의실현' 회의를 직접 참석하고, 유엔인권위 방문해 피해국의 연대 서명을 전달하는 등 힘든 몸을 이끌고 백방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계신다. 몸이 힘들어도 언제나 밝은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아델라 할머니도 아픈 상처를 숨기고만 살았던 과거를 떨치고 작품 속에서 아들에게 엄마의 과거를 고백한다. 가족이 상처받고 가정까지 깨어질까 봐 평생을 숨겨왔던 진실을 접한 아들은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낸다. 가슴 속에 숨겨왔던 아픈 기억을 내뱉는다고 해서 할머니의 가슴 속 응어리진 한이 풀릴 리 없다. 하지만 아들의 눈물은 아마도 할머니에게 삶을 좀 더 굳건하게 이어갈 정화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전쟁 후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차오할머니의 아픈 상처는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금기였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가부장적인 중국 사회에서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보지 않아도 그려진다. 결국,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고 그 적적함에 딸 하나를 입양해 키웠다. 그 딸도 할머니의 아픔을 최근에야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접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발이 붓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지만, 딸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오늘도 장작을 패고 계신다. 잔혹했던 시간은 과거 속으로 흘러갔건만 아득한 과거에 입었던 상처는 평생 그들의 삶을 뒤틀어 왔다.
▲ 또 다른 피해자<어폴로지>에 나오는 위안부 피해자 필리핀 '아델라' 할머니.ⓒ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
국제적인 관심과 해결 노력에 기여할 듯
▲ 캐나다 감독 '티파니 슝'티파니 슝 감독은 한국과 중국, 필리핀을 오가면 6년간 세 할머니의 삶을 기록했다.ⓒ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영화가 피해국도 가해국인 일본도 아닌 제3국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가해국도 피해국도 아닌 제3국 캐나다 감독에 의해, 캐나다 영화진흥단체의 후원을 받아 6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위안소를 운영해 비인간적인 전쟁을 더 잔혹한 인간 잔혹사로 만든 일본의 만행은 비단 민족과 민족 간의 핍박과 수탈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만행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극악무도한 잔혹 행위였다. 그런데도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피해국 사회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경제 대국 일본과의 관계나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는 국제 관계 때문에 피해국 정부마다 이를 대하는 인식이나 태도, 해결 노력의 모습이 아주 다르다. 여전히 인간의 존엄은 경제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1963년 박정희 정권 시절 맺어진 한일협정은 식민지 수탈에 대한 포괄적 배상이었음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3년간 식민지를 겪었던 필리핀의 배상 규모가 6억 달러였는데 36년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탈과 억압을 당한 대한민국의 배상금은 3억 달러였다. 당시 정권의 관심은 이 배상금이 주가 아니라 이면으로 들어오는 6000억 달러의 자금이었다는 의혹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는 배상금이 단어조차 없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 지원재단(화해와 치유재단)을 설립하면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출연하며, 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조건만 충족되면 위안부 문제가 최종 해결된다는 게 골자다. 일본의 태도는 사과와 반성에 대한 진정성은 부재하고 국제 관계 속에서 위기만 모면하자는 얄팍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사죄와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면죄부만 주는 격이 되어 버렸다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합의다. 실제로 2016년 한국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 관련 유네스코 등재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으며, 화해와 치유재단의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부산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 철거 또는 이전을 관련 단체와 협의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소녀상'2011년 12월 14일 민간단체 정대협이 중심이 돼 서울 종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외에 30여 개가 설치되었다.ⓒ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
우리 정부의 태도나 행보는 피해자에 대한 위로보다는 정권 홍보와 또 다른 어떤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합의의 이면에는 분명 대중 봉쇄를 위해 한미일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과 일본의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도 있다. 그 어디에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은 가해국과 피해국이 모두 의식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국제적인 관심과 압박이 필요하다. 길원옥 할머니와 정대협이 여러 국가의 탄원서를 모아서 유엔인권위에 제출하는 등의 활동도 결국 같은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3국의 감독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전 세계에 배급되어 상영될 것이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또 하나의 역할을 분명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국제 영화제에 상영되면서 전 세계 매체들이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평들을 쏟아 내고 있다.
다큐멘터리 <어폴로지>에 쏟아진 매체평 |
'2016년 100대 아시아 영화'(아시아필름페스티발) '팝콘 대신 크리넥스를 팔아야 한다'(할리우드 리포터) '반드시 보고 들어야 할 이야기'(토론토 필름 신) '7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은 과거 인정을 향한 투쟁'(메트로 뉴스 캐나다) '이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할리우드 노스 매거진), '보려하고 들어려 할 때 이해할 수 있다'(POV매거진-캐나다 다큐멘터리 및 독립영화 매거진) |
반드시 보고 들어야 할 이야기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청산에 목을 매야 하는 이유는 뭘까? 냉전 체제가 종식되었지만 여전히 국제사회는 불안하다. 종교적 갈등과 이전에 없던 경제적 갈등이 새로운 분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도 지구촌 어느 한구석에서는 갈등의 폭발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로 수십 년간 전 세계인들에게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일본, 매번 곤욕스러워하는 일본 정부를 교훈 삼아 분쟁이 불가피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만은 지켜지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는 제대로 된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부디 이 영화가 비단 대한민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