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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칼럼 12] 교회에 가는 것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0824 작성일 2018-04-22 08:48 조회수 3512

21세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god)을 믿는지, 아니면 믿음체계의 교회가 만든 소위 믿음’(so-called belief)을 믿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분별하지 못한체 심각한 혼돈에 빠져있다. 사실상,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믿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보상심리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교회가 상업적으로 만든 믿음의 공식즉 타락--회개-구원이라는 사영리(四靈理) 교리를 입술로 인정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 다시 말해, 교회는 천국-지옥, 구원-심판, 축복-징벌, 현세-내세의 이분법적이며 조건부적인 교리를 암시하는 신성론(예수는 하늘 위에서 땅으로 내려 온 하나님)과 구원론(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과 창조론(초자연적인 하나님이 미리 계획한대로 우주세계를 창조했다)을 관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규정했다. 불행하게도 인류역사에서 이런 믿음이 세상을 구원하기는 커녕 배타주의와 우월주의로 인종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종교차별, 생태계파괴, 전쟁과 테러를 불러 일으켜 지구촌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세상의 위급한 문제들을 못본체하거나 무시해왔다. 이 믿음이 계속되는 한 지구촌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오직 교회에 가는 것과 성서를 많이 읽는 것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과 헌금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것은 죽은 후 천국에 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 없고, 더욱이 질병에 걸리지 않고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책도 될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 돈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보상심리의 믿음은 교회기독교가 만든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꼼수에 불과하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전에 희생재물을 바치는 것과 십일조를 바치는 것과 교리들을 입술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런 믿음체계에 대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선한 일을 하면 하느님이 몇 갑절로 축복해 준다는 사탕발림의 유혹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만든 믿음을 믿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하나님의 보상조건이 아니다.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우월적이고 이분법적인 믿음없이도 선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보상이 없어도 자율적으로 선할 수 있다. 교회는 인간의 본성을 원죄론과 구원론과 창조론으로 변질시킬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은 믿음체계가 만든 교리적 공식 안에 감금될 수 없다. 사람들은 제도적 종교와 믿음체계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기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교회 가는 것만도 아니며, 다만 하느님의 의미를 평범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교회가 만든 믿음=구원이란 공식을 수동적으로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과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며, 믿음은 상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며,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을 죽음과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권위적인 교회에 순종하여 억지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의 참 믿음은 역사적 예수가 산 것처럼 하느님의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기독교 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believing)은 보상심리를 떠나, 나와 이웃을 공평하게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beloving)이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우주 전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체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하느님의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실천적으로 살아내는 것(living)이다. 따라서 믿음은 조건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이다. 불행하게도 죽음과 생존의 두려움에 빠진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믿음체계가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이분법적인 교리에 세뇌되어 믿음과 사랑은 동일한 의미라는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첨단과학시대의 현대인들은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하늘 위의 초자연적인 신-하느님-알라-야훼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문자적으로 믿고 의존하는 망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다고 인식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현저히 다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개인적인 신앙과 삶은 물론 공동체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모습을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게 만든다. 

 

원초적으로 하느님, 하나님, 하나님 나라, 천국, 하늘 나라, 구원, 영생, 부활의 의미는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형으로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깨닫는 현실적인 실제이며, 삶의 방식이고, 순간의 영원함이다. 무엇보다 이 말들은 평범한 삶 속에서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체험과 깨달음이기 때문에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중개인과 교리적 필수조건들이 필요없다. 역사적 예수에 따르면, 구원은 지금 여기 현세의 문제이고, 영생은 죽은 후 다른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평범한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으로 감겼던 눈이 뜨여지고 닫혔던 마음이 열리는 깨달음이다. 따라서 구원과 영생은 종교 넘어 이미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성적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궁극적인 진리 즉 하느님의 의미를 탐구한다; 하느님이란 각 사람의 깊은 내면에 있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라는 실제이다; 하느님은 외부에 있는 존재(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실제이다; 하느님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다만 항상 함께 있는 하느님을 인간이 느끼고 깨닫지 못할 뿐이다.); 조건없는 사랑과 공정한 분배의 정의와 평등과 평화인 하느님은 영원하다. (다만 인간은 변함없는 하느님을 이분법적 교리와 제도와 하늘 위에 감금하고, 자율적으로 느끼지 못할뿐이다.); 모든 인간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인 하느님의 형상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오늘 과학시대에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과 축복을 얻기 위해 종교의 믿음체계가 만든 공식들과 필수조건들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인이 필요없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관념적인 고백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21세기 주류 과학계와 종교학계는 밝히기를,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우주와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이 하늘 위에 만들어 놓은 전지전능한 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은 공정한 분배의 정의이며, 만인평등이며,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20만 년 전 인간의 자의식이 먼저 있었고, 하느님이란 말은 나중에 생겼는 데,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은 궁극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하느님이란 말은 7만 년 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식혁명으로부터 등장했다. 창조성과 자율성과 가능성을 본성으로 지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세계를 그리고, 역사를 만들고,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창조했다. 삼층 세계관도 인간의 창조적인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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