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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칼럼 13]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해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0852 작성일 2018-04-29 11:55 조회수 3164

325년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치적인 수단으로 니케아신경을 강제적으로 만든 이래 지난 1700년 동안 교회기독교의 믿음체계는 세계를 정복하고 인간을 통제하려는 야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믿음의 공식을 믿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교회는 하느님이란 말의 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왜곡된 믿음으로 하느님을 인간 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으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성스러운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죄인으로 폄하했다. 이것은 엄연히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거부하는 거짓 믿음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런 믿음때문에 76억이 살고 있는 지구촌에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참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빼앗긴체 불필요한 두려움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다. 비인간적인 불의에 대해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교회기독교가 신봉하는 삼층 세계관의 이분법적 신학과 근본주의 믿음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런 믿음은 인종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종교차별 등의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와 황금만능주의와 내세주의가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자유와 희망과 권리를 박탈했다.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그런 믿음체계는 인간의 본성과 생명과 현세계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며, 죽은 후 내세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종교적 권위나 인간이 만든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다. 인간은 사람들이 만든 신 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될 수 없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적 예수는 인간이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38억 년의 우주 역사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하면서 정직하고 이성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 인간이 밤하늘의 별들을 보는가? 아니면 별들이 우리를 보고 있나? 전문가들은 밝히기를, 현대과학이 공개적으로 계시하는 우주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상식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물론 우주 이야기가 제시하는 답변은 과학적이고 동시에 종교적이다. 또한 우주 이야기의 해답은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살고 있는 수십억 인류에게 건강하고 아름답고 생명이 넘치는 밝은 미래를 위한 공통의 대의가 된다.

 

오늘 밤 전 세계 사람들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 볼 것이다. 물론 21세기의 우리는 천체학, 진화생물학,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 현대과학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들에 근거하여 육안으로, 천체망원경으로, 인공위성 등으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본다. 천억 개의 별이 무리를 지은 우리의 은하수는 100-130억 년의 진화과정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서 수많은 별들을 탄생시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은하수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45억 년 전 하늘 밖의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해서 미리 설계한대로 완성품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지구는 오랜 세월동안 우주의 지율성과 창조성의 진화과정에서 출현했으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인간도 우주의 자율적인 진화과정에서 20-30만 년 전 지구에 출현했다. 따라서 우리가 은하수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탄생시킨 모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은하수를 보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은하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은하수에 의해 탄생한 바로 그 눈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우리는 우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고, 자신을 아는 눈이다. 인간이란 지구가 의식의 눈이 뜨여져 자의식하게 된 생물종이다. 인간을 통해서 지구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를 발명했으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세상들을 창조했다. 이러한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위해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우주이며, 지구 자체이다. 우주와 지구와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으로 자연스럽게 운행하고 있다. 우주의 법칙을 간섭하고, 인간을 통제하는 초자연적인 힘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본성 즉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로 막는 힘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일뿐이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은 우주적 자연으로부터 느끼고 깨달은 생명의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을 하느님, 야훼, 하늘님, 알라, 브라만, , 위대한 영, 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성서와 코란과 경전들을 기록했다. 종교적 경전들에 묘사된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현대어로 전환하면, 전체적 우주(세계), 개체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전체, 우주적 삶의 현실적인 실제(實際), 인간의 온전한 삶의 요청, 자율적인 삶의 요청, 행복한 삶의 비전, 평화로운 삶의 희망을 뜻한다. 기독교 성서는 이것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하느님의 형상이란, 이성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이며, 또한 인간의 창조성 자율성 가능성 그리고 잠재력이다.

 

다시 말해, 우주를 인식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하느님이란 인간의 숭배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의 온전한 삶을 위한 궁극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이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자율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깨달아 알게 된 궁극적인 실제(實際)이며, 믿어야 하는 존재적 실재(實在)가 아니다. 즉 하느님이란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종교적 요청이며,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가 만든 창작품이다. 또한 삼층 세계관의 믿음체계는 교회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최후심판과 지옥천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주 전체는 구성하는 각 개체들이 따로따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의 망이라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하늘 위에 인격적인 하느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비단 어떤 하느님이라도 인간 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

 

[참고: 실재(實在)와 실제(實際)의 차이]

하느님의 Reality’ "실재(實在)"에서 "실제(實際)"로 교체되어야 한다. 사전들은 "실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실재"라는 용어는 실제로 존재함’, ‘사물의 본질적 존재등의 의미이다.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에서 전해진 Reality를 실재(實在) 또는 실제(實際)로 번역했다. 하느님의 실재(實在)와 하느님의 실제(實際)는 큰 차이가 있다. “하느님의 실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물질적이고 인격적이고 외부적인 존재에 대한 말이고, “하느님의 실제는 그 반대로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를 우주세계의 삼라만상으로부터 내면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인식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참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신약성서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십 팔 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이 치유받기 위해 예수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율법을 범한다고 비난했다. 이때 예수는 너희 위선자들아,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누가복음서 13:10-17) 예수의 도전은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만든 하느님과 하느님의 율법 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가 병고치는 이야기들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각시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은 종교, 신앙, 전통, 교리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은유적인 이야기들이다.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신구약 성서의 모든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참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중요한 진실은 땅에 묻힌 진주처럼 문자 뒤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허리도 펴지 못하고 마치 암흑 속에서 죽지못해 살았던 여인을 보았다. 예수는 가르치던 것을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치유해주었다. 이 여인의 희망은 오랜 세월동안 종교적 율법과 제도와 형식에 짓눌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체 생존해온 자신의 절망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당 지도자는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기고 여인을 치유해주는 것에 대해 격분하여 예수를 비난했다.  안식일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행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하느님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 중에 가장 으뜸가는 법이었다. 안식일법은 하느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법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강조하기를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의 말을 현대의 말로 전환하면, 인간은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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