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교육과 문화와 철학과 가치관과 윤리관은 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이 엄연한 사실을 거부하거나 모른체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몰상식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의 종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런 하나님이 내세에서 영원히 살고, 현세에서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기를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종교는 믿음체계가 만든 믿음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축복을 받고, 안믿으면 기적과 축복은 커녕 무서운 징벌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이분법적인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종교는 유신론자들의 독점물도 아니며, 더욱이 교회와 사원과 사찰의 특허품도 아니다. 원초적으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에 대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며, 자율적으로 참 인간됨을 탐구하는 길이기 때문에 종교는 믿음의 길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의 삶의 요청이고 표현이고 방식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하나님의 의미를 살아내는 것이 필연적으로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란 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오늘의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 이분법적 교리로 덧칠하지 않은 참 인간 예수, 만인 구원의 예수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었던 우주적이고 현실적인 통합비전을 지금 여기에서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신격화된 교리적 예수 없는 기독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예수,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하나님 예수, 구원과 징벌의 중개인 예수 없는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이다.
오늘날 전쟁과 테러와 빈곤과 생태계파괴와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인습적인 종교체제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초자연적인 신) 없는 종교, 하나님 없는 기독교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리들이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간에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오해하거나 판에 박힌 진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랜 세월동안 인습적인 종교단체들은 마치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과 죽은 후 내세를 꿈꾸는 무당집이나 점쟁이집처럼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참 종교의 의미와 기능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종교의 목적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며, 죽은 후 내세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며,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종교의 기능은 거룩한 교인과 벌레만도 못한 죄인,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도덕이 아니며, 성속의 경계를 초월하는 삶의 방식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 처하더라도 참 인간됨과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종교는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영원함을 추구하는 현세적인 삶의 길이다; 종교는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기 보다, 모든 개체들의 우주적인 통합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타자 또는 중개인이 만든 공식과 교리와 형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거나,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종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단 또는 회의주의라고 정죄하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결론적으로 종교는 평범한 삶의 언어와 행위이다. 종교는 특정 교리와 전통에 순종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Religion’ 이란 말이 최초로 동양에 들어왔을 때 번역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으며, 결국 종교(宗敎)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못된다. Religion 이란 말의 어원은 ‘relationship’(관계)이다. 종교는 두려움과 편견과 우월주의와 배타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체들이 통합하여 전체를 이루어 온전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다시 말해 전체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인간의 성숙한 삶을 위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종교이다. 특히 종교는 타율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율적인 깨달음이다.
종교는 교회나 신전이나 사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행위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또한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자신의 믿음을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한 시간과 나 자신을 위한 시간과 내 이웃을 위한 시간을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숨쉬고 움직이고 사는 모든 것이 종교이다. 사고하는 호모싸피엔즈 인간은 종교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난 100년 동안에 인류사회는 엄청난 격동과 변혁을 가져왔다. 첨단과학의 발달은 물론 신학, 철학, 예술, 문화의 분야가 초고속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지구촌이 이제는 하루 생활권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지난 100년 동안에 수없이 많은 전쟁과 테러 사건들이 있었다. 큰 전쟁들만 열거해도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발칸반도전쟁, 걸프전쟁, 이락과 아프가니스탄전쟁 등으로 수 천만 명이 죽었으며, 아흐슈비츠 포로수용소 대학살과 9/11 뉴욕의 테러사건과 북아일랜드, 아프리카,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등 세계 도처에서의 테러들로 인해서 무고한 생명들이 수 백만 명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전쟁과 테러는 종교적인 분쟁들이었다.
더욱이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사는 인류의 집인 지구의 생태계가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때가 없었다.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고하기를 이대로 가면 지구는 멸망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오직 유일하게 지구뿐인 데 지구가 죽으면 갈데올데 없이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경고다. 지구는 땅과 물과 공기와 불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의 생명줄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다. 인간 만이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세상은 심판받아 멸망할 세상이라고 못본체 하거나, 버려두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없다. 오직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아프리카와 호주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땅(지구)을 성스럽게 생각한다. 원주민들은 땅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과 함께 산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땅과 사람은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성서의 고대 히브리인들도 땅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7년마다 한해 동안 땅에 안식년을 주었다. 그리고 50년마다 땅을 원소유자에게 돌려 주었다. 땅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고, 다만 청지기로써 맡아서 잘 돌보는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또한 원주민들은 땅 위에 사는 동물과 식물도 성스럽게 생각한다. 사냥을 할 때에도 일용할 양식 만을 사냥하며, 동물을 죽일 때에도 미안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식량으로 삼는다. 땅 만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땅과 함께 사는 모든 생명들이 성스럽다. 왜냐하면 위대한 영을 모든 만물을 통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도 위대한 영의 숨결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