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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칼럼 – 종교문맹퇴치 22] 역사적 예수는 천국-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믿음을 거부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11010 작성일 2018-07-01 08:20 조회수 3489

[21세기의 종교(Religion)는 어떤 대상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우주의 개체들이 상호의존관계 (Relationship)를 이루어 살아내는 삶이다. 따라서 믿는 것(believing)과 사는 것(living)을 분리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종교문맹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종교문맹은 종교의 진리들과 과학의 진리들을 별개의 것들로 따로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역사의 진리들과 종교의 진리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문맹은 우주진화 세계관이 사회주류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에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분별하지 못하거나, 그 분별을 무시하고 거부함으로써 비과학적인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종교문맹은 인류의 밝은 미래에 큰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종교문맹은 반드시 퇴치되어야 한다.]

 

원초적으로 예수는 하늘 위에서 내려와 지상에서 걸어다닌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하루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일상생활을 즐겼던 보통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예수는 평범한 삶 속에서 비상한 통찰력으로 기존의 신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180도로 개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용감하게 선포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진리들과 종교의 진리들을 따로따로 떼어놓는 종교문맹의 모순과 거짓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된다. 종교문맹은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해당하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빈부차이로 인한 극심한 빈곤 그리고 지구촌의 생태계가 죽어가는 위기를 모른체하거나 무시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와 예수와 하느님에 대해서 양심적으로 또한 이성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특히 성서는 하늘 위의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준 책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의 삶과 사건 속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지극히 인간의 작품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환경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서 왜곡과 성서 근본주의라는 종교문맹의 암흑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면 자신의 삶은 항상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에서 불안과 초조와 지루함으로 가득한 불행한 날들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역사적 예수는 당시에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성전종교와 제국주의 신학의 이분법적 믿음을 거부하고 항거했다. 예수는 예수천국-불신지옥, 믿음축복-불신징벌의 이분법적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직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으며,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예수에게 인간은 하느님보다 더 소중했다. 예수는 진보적이며 진화적인 신앙인이었다!

 

신약성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애원하며...’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마가복음서 1:40-45)

 

21세기 현대인들은 2천 년 전 고대인들이 기록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에 대해서 읽을 때 예수는 진보적이며 진화적인 신앙인이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대 성서를 읽는 현대인들은 생명의 진화와 종교인의 신앙은 깊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한 <종의 기원>의 결론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얼클어져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강뚝은 매우 흥미롭다. 새들이 덤불 속에서 지저귀고, 온갖 곤충들과 지렁이들이 기어다니고 있으며, 서로 서로 다른 형태의 생물들이 상호 의존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주위에 어떤 법칙들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법칙들이란, 새로운 탄생으로의 발전이고, 끊임없는 재창조의 유산이며; 생명들의 환경에 따른 변화이며, 생명이 생존하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결과적으로 생명은 자연적으로 생존의 선택을 통하여 변화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소멸한다. 기근과 죽음과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나은 동물들로 변화된다. 태초로부터 창조성의 생기로 여러가지 형태의 생명들이 자연적으로 탄생한 것은 장엄한 일이다. 한편 지구는 중력의 법칙을 따라 순환하면서, 생명은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형태로 변화하며 진화해왔다.”

 

마가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와 챨스 다윈의 말은 매우 대조적이다. 하나는 수 백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신앙전승을 배경으로하여 1세기 무렵의 성서시대로부터 나온 기록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세기의 자연과학시대로부터 나온 기록이다. 두 기록 모두 현대 종교인들의 사고방식에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이다.

 

예수 당시의 종교와 사회에서 문둥병에 걸리는 원인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늘 위의 하느님이 징벌을 내린 것으로 철저하게 믿었다. 문둥병은 발진, 종기, 습진, 피부염 등 다양한 증세를 나타내는 병이다. 문등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더로운 낙인이 찍혔다. 즉 이런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내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매우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사람이 더러워지면 하느님의 기준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문둥병에 일단 걸리면 회복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평생동안 버림받고 살아야 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물론 오늘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건강함과 거룩함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사람들이 어떤 병에 걸리면 부정한 것이고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예수가 탄생했던 당시에 보편적이었으며 종교와 사회를 지배하던  가치관이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믿음 내지는 가치관에 세뇌되어 잘 길들여지고 단련되었다.

 

마가복음서의 앞 부분에 예수가 부정한 영’(더러운 귀신) 즉 악령에 사로잡힌 소위 부정한 사람들과 대면하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현대의학에 익숙하고 이것에 의존하고 사는 21세기의 현대인으로서 고대인들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악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이 인간의 외부에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다. 물론 아직도 수 천년 전의 고대인들처럼 악령이나 귀신이 분리된 존재로 떠돌아 다니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다수의 기독교 목사들까지도 이것을 믿고 있다.

 

잠시, 신약성서 마가복음서의 이야기와 챨스 다윈의 이야기를 좀더 깊이 살펴보겠다:

(1) 마가복음서의 초점은, 예수가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초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대신,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복음서 저자 마가가 새롭게 깨달아 알게 된 예수의 하느님소중한 생명부정한 생명으로 멋대로 정죄하여 인간사회로부터 추방해버리는 더러운 세력들을 거부한다는 자신의 확신을 메세지로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들은 성스럽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 처했을 때라도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종교적인 진리이다. 복음서의 기록에 땨르면, 역사적 예수는 더러운 죽음의 세력들이 생명의 존엄성과 새로운 재창조를 방해하고 가로막고 있는 것에 대해서  못본체할 수 없었다.

 

(2) 필자는 전직 지질학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인 진리임을 확신하며 그 정당성과 타당성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진화론은 수 십만 년의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깨달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윈이 깨닫고 발견한 진화론의 기본개념은 모든 생명은 환경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롭게 재창조된다는 것이다.  이 과학적인 진리를 거부하거나 한갖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과학을 무시해버리는 사례를 남겨주고 만다. 특히 종교와 과학을 따로 분리시키면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온전치 못한 반쪽쨔리 신앙이 되고 만다. 과학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앙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대 유전자 공학과 분자 생물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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