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주 진화론에 근거한 현대과학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과정의 기초가 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와 정치와 철학을 이해할 때에 과학과 분리해서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학 없는 세계와 삶은 불가능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세계관을 인식하지 못하는 믿음체계와 인종과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성서는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용도폐기처분될 위기에 빠졌다. 성서는 과학책과 역사책과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자율적으로 종교적 경전들을 과학의 기초 위에 읽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제도적인 교회 기독교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믿기때문에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고립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결국 그들의 믿음과 성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이 주변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한다.
3천 년 전에서 2천 년 전까지 1000년 동안 지리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하고 복사하고 극소수 취사선별해 모은 부족적인 고대 성서는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하면 인종과 종교와 과학의 경계 넘어 자율적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지혜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서는 삼층 세계관의 세계에서 기록되었지만 성서비평과 재해석을 통해서 고대 언어를 현대 언어로 전환하면 이 시대에 적절하며 생기가 넘치는 새로운 윤리관과 가치관의 공개적 계시를 제시할 수 있다. 21세기에 성서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성서는 부족적-민족적-국가적인 작은 그림의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기초로하는 원초적인 성서는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한 표층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더욱이 이분법적인 대속론의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는 교회에 나가고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과 구원이 보장되는 옹졸한 책이 아니다. 성서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기적에 대한 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책이다.
1920년대 이전까지 인류는 은하계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1950년대에 와서 우주는 팽창한다는 사실과 우주의 시작은 빅뱅(Big Bang)에서부터 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공위성에 부착된 허블 천체망원경 덕분에 하나의 은하계 안에 수천억 개의 별들이 있고, 우리의 우주 안에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또한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 이외에 또다른 우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00년대 말에 와서 우주는 약 138억 년 전에 출현했고, 지구는 45억 년 전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70년대에 지질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판구조론이 발견됬고, 지구의 모든 지각변동들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3천 년 전 내지 2천 년 전에 성서를 기록한 고대 유대인들은 이러한 현대과학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과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삼층 세계로 가장 높은 하늘 위에는 하느님과 신들이 살고, 중간층에는 인간들이 살고, 맨 아랫층에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태양을 비롯한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반박하고, 지구 중심설이 아닌 태양 중심설, 즉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기 전까지 교회 기독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의 모습은 평평하다고 믿었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성서 저자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소수의 어휘들만을 사용하여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묘사했기때문에 성서 전체는 은유적인 기록일 수 밖에 없다. 비단 21세기의 현대과학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들도 황홀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표현할 때에 문자적인 글 보다 음악과 미술과 시를 통해서 심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은유법을 사용한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우주의 나이는 빅뱅으로부터 138억 년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약45억 년 전에 생겨났으며, 지구 상에 생명은 40억 년 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인간이 나타난 것은 260만 년 전이며, 30-20만 년 전에 이성적 인간 즉 원시 호모싸피엔스가 등장했고, 4만 년 전에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 호모싸피엔스가 등장했다. 다시 말해, 이 세계가 출현한 목적은 인간을 위함도, 어떤 생물을 위함도 아니었으며, 대단히 우연적이고 자연적이었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 저자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들은 이러한 지질학적-천체학적-인류학적인 정보를 뒤집어 엎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수천 년 전에 수 백 년 동안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성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독특한 환경에서 개인적 내지는 공동체적 경험을 기준으로해서 주관적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가 소중함과 내면으로부터 느끼는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신화적이고 서사시적으로 기록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지구상의 최초의 생명의 모습은 미리 설계된대로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해 갈 미완성의 단세포였고,
신학교에서 성서는 은유적으로 읽도록 기록된 책이며,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라 단지 많은 권위들 중에 하나일뿐이라고 배웠습니다. 처음에 교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때 나의 성서근본주의 믿음은 크게 경악했습니다. 첫 학기 동안 나의 양심과 이성은 갈등과 고민으로 이루말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나의 눈과 귀가 열리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저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느끼고 고민하는 새로운 삶의 여정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과거에 나의 하느님과 교회와 성서에 대한 "믿음"은 보상심리의 거래관계였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어떤 댓가를 바라는 사심이 가득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 알았습니다. 원초적으로 믿음이란 말의 어원은 사심없는 사랑이라는 뜻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성서는 보상을 바라는 믿음의 객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하느님과 성서는 오히려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차별주의 등의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들을 양산했습니다.
보수적인 신자들은 믿는 것은 자유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차별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챙기는 파렴치한 행위가 될 때에 그 믿음을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이웃들과 지구촌의 동료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용도폐기처분해야 합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말할 수 있느냐고 분노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입니다. 우리 작은 사회도 그렇습니다. 나의 믿음은 개인적인 욕심을 챙기는 표층적인 것 보다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적어고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믿음에 대해 교인들에게 정직하고 이성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목회자가 되는 안수를 받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고 그가 몸소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과 성서와 교회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여정이 시작된 마당에 나는 앞으로 목회자로써 예수가 산 것처럼 살 수 있겠는지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연합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20년을 목회했습니다.
성서는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흉물이 되고 사탄과 마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근대사에서 성서문자주의가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내세주의 황금만능주의 전쟁 테러 등의 추악한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핵심적인 사상은 우주적이고 통합적입니다. 성서는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완전한 책이 아닙니다. 오류투성이고 왜곡된 사실로 가득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은 문자적인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진실한 책입니다. 진실한 책을 추악한 책으로 만든 것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신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