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신봉하는 기독교를 세우지 않았다. 예수는 유신론적 종교제도를 만들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기독교의 탄생 동기는 예수라는 인물이 아니었다. 원초적인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인식하고,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그가 산 것처럼 살려는 “삶의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유신론적 믿음의 부족적 집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종교를 철저히 거부하고 파괴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유신론적 종교제도 없이도 인간은 온전하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유신론적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성을 갖추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참 사람 예수는 이 온전함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이 살아냈다. 이 때문에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은 하느님이란 말의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론적 종교가 탄생하는 주요 동기는 다음의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첫째로, 무력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교묘한 방식으로 대처하려고 한다. 그들은 수호자인 초자연적이고 전능한 신이 무능한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망상에 빠진다. (2) 둘째로, 인간들은 삶의 현저한 무의미성의 공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자신들이 창조한 타자적, 외계적, 초자연적, 신적 존재에 대해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의존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그 신의 노예가 됨으로써 위로를 얻으려는 망상에 빠진다. (3) 셋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불가능한 희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망상의 신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상상하며 또한 자신들의 삶의 덧없는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무한의 차원을 환상적으로 믿으려 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세 가지 망상의 하느님을 신봉하는 유신론적 종교제도들은 인간의 현실인 자의식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생겨난 불안 자체를 진정시켜주는 표층적이고 궁색한 답변을 제공할 뿐이며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성서가 증거 하는 대로 역사적 예수는 이 유신론적 하느님과 종교제도를 거부하고 파괴했으니 무신론자가 아닐 수 없다.
고대 부족들의 생존의 두려움에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형된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종교제도들은 원초적으로 인간의 진리 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적 종교제도들은 오직 인간의 안전 추구와 직결된 것이다. 인류사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유신론적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안전만을 추구한다. 종교인들은 미사여구를 그럴듯하게 사용하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천상을 향한 예배와 기도로 감추려고 하는데 이러한 방식이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역사적 예수는 그런 유치한 행태를 가르치지 않았다.
유신론적 종교는 전통적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진정한 안전이 아니라 그 환상만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종교는 대부분 민중의 아편 구실을 한 것이 사실이다. 교회 기독교는 이러한 부족적이고 이기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종교의 길을 걸어왔다. 21세기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안정과 행복과 의미를 원한다면,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예수를 떠나보내고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파괴한 참 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 무신론적 예수의 정신을 현실적으로 살아내어야 한다.
성서는 어떻게 예수가 자기를 키워준 유신론적 종교와 믿음체계에 반대하고 저항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들을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으로 초대했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참된 인간성과 삶의 모습에서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인식했다. 복음서에 묘사된 원초적인 예수상은 온전한 참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역사적 예수는 이분법적인 부족적 축복과 보호와 안전을 생산하는 상업적인 종교적 규율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내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그의 안전장치가 아니었다. 하느님이란 말의 뜻은 인간됨의 의미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비전이고 방식이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인간을 통제하고 간섭하고 조정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를 생명 지향적이었다고 성서에 기록했다. 예수의 가르침의 상당 부분은 현세적인 삶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는 빈번히 파티를 열었다. 그의 가르침과 삶에는 생명과 삶의 향기가 진동했다. 예수의 말은 상투적이지 않았으며, 진부하거나 지루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행동은 외형적으로 거룩한 척하는 가식이 없었다. 예수의 언행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유로웠다.
요한복음서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8:1-11)가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간음 문제가 아니다. 예수는 발생하지도 않을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유신론적 종교와 사람들이 만든 도덕법을 하느님의 법이라고 거짓말하는 상업적인 종교제도의 유치한 행태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도덕주의와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은 인간의 온전함을 성취하기는 커녕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한다고 경고했다. 예수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성전과 교회와 기도원에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로움과 정직함과 선함의 징표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도덕법을 외형적으로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다. 도덕주의와 의로움과 경건함은 결과적으로 사랑이나 새로운 삶을 낳지 못한다. 그것들은 법칙과 종교적 통제만을 양산할 따름이다. 인간이 되려는 것과 종교인이 되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사람들을 유신론적 종교인으로 만드는 종교제도를 철저히 반대했으며 유신론적 믿음 없는 온전한 인간성을 살아낸 무신론자 유대인이다.
예수는 언제나 인간성을 종교법 위에 놓았으며, 종교적 규율들은 인간의 온전함을 위해 불필요하며, 오히려 종교제도가 없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가르쳤다. 하늘 위에서 명령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와 기도에 대해 예수가 강력히 도전한 것을 성서는 증거한다. 마가복음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간 이야기를 기록했다(2:23-28). 그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랐다. 유신론적 통제 종교의 수호자들은 이 범행을 규탄하기 위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면서 소위 하느님의 법을 즉각 끌어들였다.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안식일에 지키도록 규정된 종교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부합하지 않으면 부도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유신론적 종교의 우월적인 순위를 뒤집었다. 즉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안식일 법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만일 종교법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제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이름으로 폐기 처분해야 한다. 예수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과 분리되어 하늘 위 외계에 고고하게 존재하는 가상적 타자 곧 초자연적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되고 온전한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실제로 이와같은 기도를 하신것이 사실 입니까? 성경에 은유적으로 적어 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늘봄 목사님의 해석과 판단을 기다립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원본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본들 중에 극소수의 모음집입니다.
실종된 원본이 기록된 때는 예수가 죽은 후 약 50-80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원본이 실종되기 전에 약100여년 동안 필사가들에 의해 사본에서 사본으로 무수한 복사판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성서의 원본이나 사본들을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한 오늘처럼 훌륭한 필기도구와 녹음기도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예수의 행적을 기록으로 전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들만 무성했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마다 주관적인 해석과 수정첨삭이 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현대인들의 성서는 어느 때에 단행본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견된 책도 아닙니다.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사된 것들 중에 극히 주관적인 해석과 신앙으로 편집된 모음집입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고대 경전들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서사시적이고 신화적인 지혜서입니다. 즉 은유적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책입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위험합니다.
성서를 포함해서 모든 고대 경전들은 은유적인 신화이며 하늘 위에 존재한다는 망상의 초자연적인 신이 기록해서 인간 세계에 내려준 책이 아닙니다.
성서와 종교의 주체는 객체적인 하느님을 맹신하는 믿음에 대한 책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의 온전한 삶에 대한 지혜서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을 탐구하는 안내자입니다.
예수는 목회 할적에 기도를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기도는 하지 않았다고 판단 하십니까?
예수의 하느님은 인간과 분리된 타자, 외계인,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힘, 성령 등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낸 하느님의 의미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이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무엇을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이 일어나라는 주술도 아닙니다. 예수는 그런 기도를 하지도 않았지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직역적으로 맹신하는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상업적인 술책으로 잘못된 기도와 예배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묵상과 명상의 기도입니다. 예수에게 외부의 하느님은 없었습니다. 그의 하느님은 믿어야만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오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의미는 조건없는 사랑, 폭력없는 평화, 공정한 분배의 정의입니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 이해의 기도는 더 이상 설득력과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저의 기도는 명상(meditation)과 묵상(contemplation)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미사여구의 말들을 중얼거리거나 소리높여 외치는 기도는 저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는 어떤 큰 힘, 초자연적인 존재, 나와 분리된 외부의 하느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 기회 있을 때에 기도에 대해서 더 심층적이고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20년 동안 교회 예배 순서에서 행한 소위 기도문들을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