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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브로드웨이에 갔을때도 거기 가면 무조건 연극을 봐야한다니까 그런가보다하고 갈 때마다 티켓을 구입하긴 했지만 3 분의 1 은 졸다가 나왔다. 연극을 즐기지 않는다기보다는 연극에 취미가 없어서 볼 줄을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싸르니아’라는 지구인물의 배역을 맡아 명연기 중인 나도 그의 인생을 연기하는 시간 중 3 분의 1 은 잠자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연극보다가 3 분의 1을 졸았다고 해서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배우로서 ‘지구인물 싸르니아’가 악역이나 나쁜 배역이 아니라는 점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연극 ‘ROOM’ 을 봤다.
Emma Donoghue 의 원작소설을 각색했는데, 연극의 시나리오를 원작소설 작가가 직접 썼다. 2015 년 영화로도 소개된 적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토론토 Princess of Wales 극장에서 선을 보였다. 연극으로서는 세계 최초일 것이다.
원래 연극 ‘룸’은 2 년 전인 2020 년 3 월 13 일 첫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그 무렵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으로 공연이 무산됐었다.
7 년 전, 열 입곱살 소녀 ‘Ma’는 어떤 남자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 감금되었다. 가족, 친구는 물론 모든 세상과 단절되어 생활하던 Ma는 방에 갇힌지 2 년 후 납치범의 아들 ‘잭’을 낳고 엄마가 된다.
5 년 후 어느 날 아침, 작은 방에 갇혀 지내온, 이제 24 살이 된 엄마와 5 살 아들이 기상해서 나누는 대화가 이 연극의 첫 장면이다.
작은 침대와 TV, 스탠드, 그림, 변기와 식탁이 있는 그 작은 룸이 그 룸에서 태어난 다섯 살 소년이 보고 겪은 세상의 전부다.
TV에 나오는 바깥 세상은 허상이고 가짜 세상에 불과하다.
공연시간은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2 시간 30 분 이다.
연극 전반부는 엄마와 아들이 룸 안에 갇혀지내는 시간을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룸에서 탈출해 바깥 세상으로 나온 후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연극이 끝날 무렵, 엄마와 함께 자신이 갇혀지내던 ‘룸’을 다시 찾아가 본 소년의 한 마디가 관객들의 뇌리를 때린다.
“룸이 너무 좁아보여”
룸에 갇혀있을 때는 룸이 우주이자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다른 세상을 경험한 후 다시 찾은 룸은 좁고 초라한 하나의 공간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소년이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다.
편협한 종교나 경도된 가치관의 ‘룸’ 안에 갇혀 그게 전부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관객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장면이다.
엄마 ‘Ma’ 역은 흑인여배우 Alexis Gordon이, 아들 Jack 역은 공연시간에 따라 Levi Dombokah 와 Lucien Duncan-Reid 두 흑인소년배우가 각각 따로 연기한다. 연기강도가 높아 두 명의 아역배우를 배치했을 것이다.
연극 ‘룸’은 토론토 Princess of Wales 극장에서 5 월 8 일까지 공연한다. 입장료는 오키스트라석의 경우 좌석열에 관계없이 100 불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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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토론토 !
함부로 타인을 정죄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그들을 혐오하도록 부추키는 사람들이다.
죄인, 지옥, 진멸같은 용어들을 동원해 타인의 삶을 정죄하고 혐오를 조장하여 그들의 영혼을 협박하는 것처럼 나쁜 짓은 없다.
죄인이라든가 지옥 따위의 히브리경전(구약)시대 개념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자신의 영적아이큐를 심각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존재하지도 않는 이른바 지옥이라는 곳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헛소리를 진심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좁다란 룸에서 탈출하여 세상과 마주하기 바란다.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케하리니..)
아직 강력한 상관관계는 찾지 못했지만 무신론적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유대인이라고 identify한 이유로 바로 원시적 종교형태의 토라를 주 경전으로 삼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이 무신론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중입니다. 즉 무신론적 유대인도 받아들 일 수 있는 여지를 토라의 원시적 형태의 종교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저의 speculation이죠.
다른 직업도 아니고clergy들이 그토록 영적 돌대가리들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지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지옥개념은 다 거기서 거기같은데, 칼 융이 격찬했다는 파드마 삼바바의 티벳사자의 서도 후반으로 가면 지옥 이야기가 이상해져 결국은 소승불교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고요.
그건 그렇고,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카르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게 거의 분명하니, 현세의 죄는 결국 현세에서 치루게 하는 것이 공평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들이 영적 돌대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여전히 성서문자적인 해석에 머물고 그들의 인식은 남녀는 둘로 갈라진다는 이항대립쌍의 사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항 대립쌍을 제대로 비판하고 연구한 사람은 Judith Butler라는 철학자인데 [Gender Trouble]에서 제대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버틀러는 queer theories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보구요. 버틀러는 그 동안의 전통적 개념을 뒤집으려고 합니다. 즉 sex는 생물학적 개념이고, gender는 문화적 개념을 이분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동성애적 성향을 순전히 생물학적 개념이라는 인식이나 gender는 문화적 개념이라는 인식을 깨는 것이죠. 버틀러의 이론을 적용한 사람은 에피스코팔 교회의 게이 사제인 Elizabeth Edman가 자신의 [Queer Virtue What LGBTQ People]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줌으로 이분의 세미나에 작년에 참여 했었습니다.
좀 빗나간 것이지만, 칼 융의 아니마/아니무스의 이항대립쌍을 남녀 차별을 공고히 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특별한 성찰 없이 남녀 구별을 쉽게 사용하죠. 동양의 음양오행론도 그런 경향성을 갖구요. 물론 양속에 음이 있고 음속에 양이 있다는 전제가 있지만 음양오행론은 전통적인 gender 구별을 공고히 하는 것이죠.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그것이 real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real하니까 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인간은 단순히 자연에 머물지 않고 자기 세계를 구축 또는 축조해 나가는 경향성이 있고 이런 이야기 만들기는 종교에서 더 강하죠. 종교와 허구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죠. 우리가 Bound for Hell같은 네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도 불편함과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초월적 능력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티벳 불교는 보통 학자들이 대승불교, 소승불교에 속하지 않은 금강승 (비즈라야나)라고 하지만 포괄적으로는 대승불교에 가깝습니다. 달라이 라마도 보살(보디스트바)의 현신이니까요. 사자의 서는 정토종에 가깝구요.
또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한국의 전통종교 또는 민속인 조상숭배는 내세관이 거의 없고, 무속(무교)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데 내세관을 한국에 가져온 것은 정토종이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불교를 이런 점에서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The Korea Mission Field에서 저는 운 좋게 발견한 즐거움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종교가 지옥이든, 천국이든, 영생이든 상관없이 자연을 초월하려는 열망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연종교도 그렇다는 말씀이죠. 댓글이 길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