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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제목은 King’s Warden, 한국어 원제는 ‘왕과 사는 남자’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양대군이나 한명회 같은 쿠데타 주도세력이 아니라 영월로 유배된 노산군(단종)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첫 장면은 어두운 화면 위로 엄숙하게 떠오르는 한 줄의 자막으로 시작한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입니다."
사극 장르에서 으레 쓰이는 면죄부 같은 문장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이 자막이 지독한 기만이자 '거짓말에 가까운 헛소리'로 느껴진다. '상상력의 가미'라는 말은 뼈대가 되는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맥락을 존중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의 뼈대 자체를 부러뜨리고 전혀 다른 시대착오적 판타지를 세워놓고는, '단종'과 '엄흥도'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표만 뻔뻔하게 빌려왔다.
역사를 새로 쓴 수준을 넘어,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비극을 철저히 상업적 유희로 탈색해 버린 이 영화의 억지스러운 설정들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자 역사적 사실과 가장 궤를 달리하는 지점은 강원도 영월 사람들이 '마을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유배 온 고위층 양반을 경쟁적으로 유치하려 한다'는 기본 설정이다. 영화는 이를 유쾌하고 코믹한 농촌 생존기처럼 그려낸다.
조선시대, 그것도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 '최고위급 정치범'의 유배는 결코 수익 창출을 위한 관광객 유치가 아니었다. 단종의 유배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준하는 혹독하고 살벌한 형벌이었다. 단종같은 폐왕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도 역모로 몰려 유배된 사람들의 곁에 함부로 다가가는 것은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끔찍한 자살행위였다.
그런 유배객을 상대로 촌장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부푼 꿈을 안는다는 설정은, 조선의 엄격한 형벌제도와 계유정란 이후의 숨막히는 공포정치를 완전히 무시한 채, 현대 자본주의의 지역 이기주의(이 경우에는 NIMBY가 아닌 PIMFY)를 조선시대에 이식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사실 나는 계유정란과 이후 벌어진 수양대군의 왕권접수를 다른 시각으로 본다. 친일작가 이광수의 ‘단종애사’ 따위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심어놓은 일방적 관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흥도가 나름 숭고하고 의미있는 행동을 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것에 절대 이의를 달지 않는다. 신파극도 아니고 블랙코미디도 아닌 이 영화는 결국 실존인물 엄흥도마저 모독하는 꼴이 됐다.
역사 속 엄흥도는 영월의 말단 향리였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단 하나의 이유는, 세조의 서슬퍼런 어명(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에도 불구하고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 직후 그는 가족을 이끌고 문경인가 어딘가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묵직하고 결연한 실존인물을 '마을을 살리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코믹한 촌장'으로 전락시키고, 심지어 폐왕 단종과 일상을 나누며 훈훈한 우정(브로맨스)을 쌓아가는 괴상한 사이로 왜곡했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정을 나눈다는 전개는, 역설적으로 엄흥도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그 끔찍한 공포 앞에서의 역사적 용기를 훼손한다.
시신을 수습하는 행위가 그저 '친하게 지내던 불쌍한 이웃 동생'을 향한 사적인 온정으로 축소되면서, 당대 지식인과 관료들이 모두 외면했던 불의와 폭력에 홀로 맞선 한 인간의 숭고하고 목숨을 건 결단은 한낱 신파극의 눈물샘 자극용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재동(齋洞)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계유정란과 단종의 폐위는 수많은 사람의 피가 강을 이루고 무고한 이들이 도륙당한 끔찍한 비극이었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쫓겨난 것 역시 그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처참한 연장선이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이 무겁고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따뜻하고 유쾌한 '농촌 힐링 드라마'의 무대로 표백해 버렸다. "단종을 나약한 인물로만 그리지 않겠다"는 연출 의도는 좋은 핑계거리일 뿐이다. 단종이 아무리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한들, 십대 소년이 겪어야 했던 철저한 정치적 고립과 사사(賜死)의 공포가 시골 마을의 정겨운 브로맨스로 치환될 수는 없다. 권력의 잔혹함을 거세한 채 웃음과 감동 코드만을 기계적으로 짜내려는 얄팍한 상업주의가 몹시 불편한 이유다.
차라리 "완전한 허구"라고 선언하고 블랙코미디로 영화를 제작했으면 더 나을뻔 했다. 아니면 역사적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픽션이라고 선언했어도 무방하다. 물론 그럴 경우 실존했던 인물의 실명이 등장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상상력은 필수 불가결하다. 때로는 역사적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을 때 진실의 민낯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도 한다. 그러나 '왕과 사는 남자'의 상상력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 데 쓰이지 않고, 관객의 입맛에 맞게 비극을 안전하고 달콤하게 포장하는 조미료로만 쓰였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 올렸어야 어울리는 자막은 이것이다.
"본 영화는 이홍위(단종)과 엄흥도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의 이름만 무단으로 차용했을 뿐, 실제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판타지입니다."
역사적 비극을 철저히 왜곡하고 가볍게 소비한 뒤,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는 그럴듯한 한 줄의 자막 뒤로 숨는 것은 비겁하다. 아둔한 권력자가 국가 시스템을 훼손하여 백성에게 피를 흘리게 하듯, 역사 앞에 무책임한 창작자는 대중의 올바른 역사 인식에 또 다른 형태의 짙은 재(Ash)를 뿌릴 뿐이다.
영화가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도 참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추신: 나는 이 시대를 다룬 글을 한 번 올린적이 있다. 아마 13 년 전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였을 것이다. 이 영화를 안보신 분들이 이 글을 보면 이 영화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여기에 대충 정리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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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국동에서 나고 자라 그 옆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도 바로 그 옆 동네 '재동'의 이름 유래를 꽤 오랫동안 몰랐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재기발랄하고 똑똑한 아이들(才童)이 많아 재동인 줄만 알았다. 오래 전 우연한 자리에서 그 지명의 진짜 유래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재동은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운현궁을 남쪽으로 마주 보는 골목길 일대다. 서쪽엔 안국동, 동쪽엔 원서동, 북쪽엔 가회동, 남쪽엔 교동이 있고 창덕궁과도 지척이다. 예쁘고 고즈넉한 북촌 한옥마을의 중심부지만, 사실 이 동네의 이름 뒤에는 수백 년 전 발생한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숨어 있다.
재동(齋洞)의 ‘재’는 똑똑할 재(才)가 아니라, 불타고 남은 ‘재(Ash)’를 뜻한다.
왜 동네 이름에 ‘재’가 붙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1453 년 10 월 10 일에 일어난 ‘계유정란(癸酉靖難)’의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양대군은 정말 왕위만을 노린 찬탈자였을까?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계유정란 이후 3 년간의 과정을 통해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인식이 박혀 있다. 친일작가 이광수가 ‘단종애사’라는 소설을 통해 그런 식의 관념을 처음 심어놓았다. 이후 교과서가 그렇게 가르쳤고, 영화 ‘관상’을 비롯한 수많은 사극 매체들이 그를 권력욕에 눈이 먼 야심가로 묘사해 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인식일까?
조선은 흔히 생각하는 절대군주제가 아니었다. 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분점하고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였다. 이 세력균형이 무너져 어느 한쪽이 권력을 독점할 때마다 어김없이 피바람이 불었다. 흥미로운 점은 왕권이 막강했던 태종이나 연산군 시절에는 주로 ‘사대부’들이 피를 본 반면, 사대부의 권력이 왕권을 압도할 때는 가혹한 수탈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단종 치하 역시 이 권력 균형이 완벽하게 무너진 시기였다. 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황보인과 김종서 세력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병권은 물론이고, 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마저 좌지우지했다. 그들은 신하의 임명장 명단에 미리 노란 점(황표)을 찍어두고, 어린 왕에게 그대로 결재하도록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했다. 왕이 어리더라도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가 있었다면 신하들의 월권을 견제할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당시 왕실에는 그럴 어른조차 없었다.
역사책은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았다고 기록하지만,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단종의 삼촌들(문종의 형제들)은 왕위를 넘보기는커녕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도 바빴다. 안평대군은 살아남기 위해 황보인에게 아부했고, 수양대군은 아예 ‘고명사은사(단종 즉위를 명나라 황제에게 승인받기 위해 가는 사신)’를 자청해 북경으로 기약 없는 길을 떠나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막강한 권신들의 견제를 피해 해외로 도피했던 셈이다.
핏물로 연못을 이룬 밤, 그리고 잿빛 골목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계유정란은 수양대군의 치밀한 권력 찬탈이라기보다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던진 무모한 ‘배수진’이자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당시 한양 한복판은 좌의정 김종서와 병조판서 조극관의 지휘를 받는 수천 명의 정규군이 물샐틈없는 경계를 펴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껄렁패나 다름없는 무사 백 여 명 남짓. 이 병력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수양대군이 거의 단신으로 적장 김종서의 집을 기습해 그를 격살하고 지휘계통을 일거에 붕괴시켰기에 가능했던, 말도 안 되는 도박이었다.
다시 ‘재동’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온 동네를 ‘재’로 덮어야만 했을까?
야사에는 그날 가장 먼저 몰살당한 김종서의 집이 재동에 있었다고도 하지만, 실제 김종서의 집터는 서대문구 충정로(현재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다.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사저와 관련이 있다. 단종은 운명의 그 날 경혜공주의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 한명회와 권람 등이 주도하는 쿠데타 세력은 왕의 이름으로 가짜 소집명령(명패)을 만들어 대신들을 경혜공주의 사저로 불러들였다. 현재의 헌법재판소 부근이다.
영문도 모른 채 입궐하던 신하들은 경혜공주 사저 안마당에서 쿠데타군의 칼과 창에 속수무책으로 난도질당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 마당에 흘린 피가 고여 연못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날이 밝아오자 온 동네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이를 감추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해 엄청난 양의 ‘재’를 실어와 핏물 위에 덮었다.
이 끔찍한 사건 이후, 피를 덮은 재의 동네라 하여 ‘회동(灰洞)’이라 불리다가 훗날 ‘재동(齋洞)’으로 이름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아둔한 권력과 백성의 피
언젠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둔한 사람이 지도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 결국 피를 보는 것은 국민이다.”
열 두 살 어린 소년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당한 비극은 물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면도 함께 보아야 한다.
판단 능력이 부재한 어린아이가, 심지어 그를 보좌해 줄 시스템(수렴청정할 대비나 왕대비)조차 없는 상태에서 왕위에 앉아 있을 때 벌어지는 권력의 불균형. 그 극심한 불균형과 탐욕의 대가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끔찍한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계유정란은 똑똑히 보여준다.
통제할 능력도, 철학도 없는 이가 국가의 정점에 앉아있을 때 민주주의와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유린당하는지, 그리고 그 피해가 어떻게 고스란히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 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고 현실을 통해 뼈저리게 목격해 왔다
‘’’’’’’’ 후략




임동원이 수양대군 역할을, 채시라가 의경세자빈(훗날의 인수대비), 최종원이 한명회 역할을 맡았었지요.
이 세 배우의 연기도 출중했지만, 특히 한명회와 양녕대군(신구가 연기)의 대사를 통해 왕권과 사대부권력의 균형론을 처음으로 설파한 것은 조선사를 다룬 사극의 전환점이 될만큼 그 내용이 깊다고 느꼈습니다.
21 세기 K-영화가 30 년 전 사극 드라마만도 못해서야…